We Live Here : 여성, 육체성, 공간
김은산(<기억극장> 저자)
그것은 세상이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여성의 강한 변론이었다. 세상은 한쪽 눈을 가린 남성의 비틀대는 걸음걸이와 균형 잡히지 않은 말더듬 때문에 절뚝거려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 눈의 안대가 벗겨지고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찼다. 조각으로 보이던 것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멀었던 눈을 되찾으니 몸 전체가 기뻐한다. - 안나 줄리아 쿠퍼1)

넌 어디서든 날 가두려 한다.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정해준다. 너와 함께 하지 않는 곳에서도... 넌 남들이 하는 일에도 한계를 정하려 든다... 경계선을 표시하고 선을 긋고 둘러치고 에워싼다. 삭제하고 잘라내 버린다. 무엇이 두려운가? 네 것을 잃어버릴까봐? 남은 건 텅 빈 언저리뿐인데 넌 쓸모없는 언저리를 붙잡고 있다. - 뤼스 이리가라이2)


1. 난 김옥선의 사진을 바라본다

지금 내 앞에는 몇 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김옥선이라는 30대 여성 작가이다. 김옥선은 96년 첫 개인전(<Woman In A Room>, 스페이스 샘터)을 가진 이후 그룹전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김옥선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96년 개인전 팜플렛을 통해서였다.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진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후 한 그룹 사진전의 리뷰를 쓰게 되었고, 거기서 김옥선의 사진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3년 전 얼핏 보았던 사진 몇 장이 내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옥선은 자기 집 안방이나 거실, 주방에서 옷을 벗고 서 있는, 또는 앉아있는 여성들을 별다른 연출 없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특별한 구석이 없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사진의 무엇이 나를 건드린 것인가. 김옥선의 사진을 읽기 위한 단서는 ‘여성’, ‘공간’ 그리고 ‘육체성’이다. 단서치고는 너무나 무덤덤하고 추상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치열한 투쟁과 피흘림, 고통이 숨겨져 있다. 김옥선의 사진에서 ‘의외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김옥선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여자가 집에 있다. 이 문장에 대해, 문장이 환기시키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여자는 원래, 늘, 집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 남자가 집에 있다. ‘여자가 집에 있다’라는 문장과는 달리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끼지는 않는가. 여자가 집에 있는 사실과 남자가 집에 있는 사실은 ‘같은’ 상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누가, 어디에 있는가’ 즉 공간과 주체의 문제3)는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여성주의 철학자 이리가라이Irigaray는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를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성차는 역사적 사실이나 지식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과정의 본질과 의미를 해석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철학적인 가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성’과 ‘공간’을 함께 사고한다는 것은 여성의 경험과 사고에서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며 “남성들만을 위한 공간, 여성을 제한하는 공간을 보여주고, 새로운 공간의 점유와 거주,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 새로운 몸, 몸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안하는 일이다.4)

2.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누구인가?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의 기본 요소이다. 우린 언제나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고 행동한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정의와 재현 방식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고 행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5) 개개인의 지각방식과 이미지, 언어, 개념적인 사유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정체성의 문제 또한 왜 나는 그 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가, 즉 공간과 시간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된다.

공간이나 시간이 사회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맥락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규명하며 르페브르Lefevre는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다’라는 명제를 내놓는다.6) 공간은 역사적인 생산양식과 연관된 사회적 산물로서 공간마다 나름의 공간적 코드가 공간적 실천을 규정한다. 르페브르는 나아가 공간과 신체의 연결점을 마련한다. 신체 또한 공간적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신체’이며 ‘공간적 신체’라는 것이다.

공간의 문제는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간 속에 놓인 신체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공간은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낸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사고는 몸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몸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몸의 물질적이고 형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특정 공간에 존재하는 몸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비로서 ‘육체성corporeality’7)의 의미 또한 분명해진다.

공간과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몸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공간은 몸에 흔적을 남기고, 몸은 공간이 남긴 흔적을 기억한다. 살아있는 몸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몸이 가진 언어인 “몸가짐의 방식ways of body”8)으로 표현된다.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Bachelard는 공간과 기억, 정체성의 상관관계를 제기한다. “우리는 때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우리들의 존재가 안정되게 자리잡는 공간들 가운데 일련의 정착점을 알아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9) 사실 공간에 비해 시간의 이미지는 허구적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기억에 의존한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어야 가능한데 이는 시간의 지속성과 긴밀히 관련을 맺고 있다. 바슐라르는 시간의 지속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공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시간은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구체적인 공간과 몸을 통한 공간의 체험, 그것이 남긴 흔적을 지워버린 추상적인 시간은 사실상 우리에게 체험된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 또한 기억에 의존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앞에 우린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답한다. 공간의 체험들이 연속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은 기억으로 말이다. 기억이 공간적인 기억과 체험으로 구성된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이를 제공하는 공간적인 맥락, 공간적 정체성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여성 사진가 셔먼Sherman의 <Untitled Film Still #48(1979)>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48>은 셔먼이 <Untitled> 시리즈를 통해 전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진이다. <Untitled> 시리즈에서 여성들이 머무르는 공간은 현실 공간이 아니라 영화 세트처럼 느껴진다. 사진 속 여성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은 여성들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셔먼은 여성의 현실이 세트처럼 꾸며진 영화 속 공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현실 그 자체가 영화처럼 꾸며진 세트라는 것이다. 5, 60년대 할리우드 B급 영화 한 장면에서나 봄직한 사진 속 여성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일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공간에서 주어진 역할(이미지)를 재현하는 현실의 여성들이기도 하다.10)

<Untitled> 시리즈에서 영화/현실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현실 공간/사진 속에 재현된 ‘어떤’ 영화의 공간은 서로 중첩된다. 사진 속 여성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위한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50>(1979)은 그 점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사진 속 여성은 마네킹처럼 보인다. 그 여성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곳에 잠시 머물 뿐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같다. 촬영이 끝나면 해체돼버릴 셋트에서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말이다.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그는 자취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공간에 머무는 일은 ‘집 없이 떠도는 것homeless’과 같다. 자신들의 공간을 갖지 못한 여성들은 그래서 떠돈다. 커다란 가방을 든 채. 그들이 어디에서 사는지 우린 모른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누구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다untitled’. 그들은 부유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공간적 정체성의 상실은 존재의 상실 그 자체다.

3. 그녀는 방 안에 있다.

김옥선의 사진에 등장하는 공간은 현실의 구체적 공간, 집 안의 방이다. 그는 먼저 집 안의 특정 공간(안방, 주방, 거실)과 그 공간에 놓인 사물, 개인의 특정한 몸가짐의 방식 등 공간적 구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와 여성들의 이름을 연결짓는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이름 없는untitled’ 그 누군가가 아니다. 그들은 방바닥에 앉은 인옥이며, 싱크대 앞에 선 명지(가명)이며, 책상 앞에 앉은 선우이며, 옷걸이 앞에 앉은 영수다.

이는 남성 사진가 오형근이 ‘아줌마’를 명명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오형근의 사진에서 여성은 ‘웃옷을 어깨에 걸친 아줌마’, ‘호랑이 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로 명명된다. 오형근은 여성의 정체성을 의상과 가면(화장) 등 스타일과 인공적인 요소로 규정짓고 있다. ‘아줌마’들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불안과 상실감은 이 같은 규정 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줌마’들은 ‘부유하는 기표’, ‘실체 없는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방바닥에 앉은 인옥(1999)>을 보자. 인옥은 쿠션을 깔고 방바닥에 앉아있다. 인옥의 오른쪽 뒤로 보이는 낮은 책상 위에는 커피 병과 프리마 봉지, 약 봉지, 화장품 샘플 몇 개, 머리빗이 놓여있다. 왼쪽으로는 작은 탁상용 시계와 모기약, 책 몇 권이 보인다. 공간에 놓인 사물들을 통해 우린 인옥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인옥이 커피를 끓여 마시고, 약을 먹고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 빗는 모습을 그려본다. 방 안에 놓인 물건들은 그 안에서 인옥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인옥의 외모와 벗은 몸의 굴곡을 통해 그의 나이와 삶의 이력을 짐작해본다. 30대 중반에 아이를 둘 정도 낳은 몸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옥의 몸에는 전통적인 가옥 구조에서 살아온 흔적이 배여 있다. 동선이 분산돼있는 전통적인 한옥의 공간 배치와 구조 속에서는 수그리고, 구부리고 쪼그리고 앉는 것이 일상적인 몸놀림이다. 방 안에 앉아있는 인옥, 그의 주름진 뱃살, 방에 놓인 낮은 책상과 방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기억해보라. 그것은 공간과 몸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몸가짐의 방식이다.

인옥의 몸의 존재 방식은 <싱크대 앞에서 선 명지(가명)>(1999)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인옥은 앉아있고, 명지는 서있다. 명지는 인옥에 비해 나이도 젊고, 더 현대적인 공간에 살고 있다. 군살 없는 날씬한 몸매와 팔짱 낀 모습, 깔끔하게 자른 커트 머리에서 젊은 여성 특유의 취향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수세미와 그릇이 놓인 싱크대도 말끔하게 정리돼있다. 명지는 입식 생활이 주를 이루는 서구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몸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명지가 살고 있는 공간은 인옥이 사는 공간보다 균질화된 공간이며 동선도 집중돼있다. 명지의 몸 또한 인옥의 몸보다는 ‘관리된’ 몸이다. 그래서일까 명지는 주방에 서있지만 그 공간과 밀착되어 보이지 않는다.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생활 공간과 매끈하게 관리된 몸 사이에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인옥과 명지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공간의 흔적은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 흔적은 공간이 인옥과 명지의 몸에 남긴 이야기이며 인옥과 명지의 일상적인 삶과 경험, 사고가 기록된 하나의 역사이다. 공간은 그 안에 머무는 개인의 매순간의 움직임, 몸짓 하나하나의 흔적이 찍혀서 만들어진, 그들의 일상생활을 찍어낸 틀이다. 개인의 역사가 담긴 몸과 그 몸을 만든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을 함께 프레임에 담아 김옥선은 공간적 정체성과 개인의 정체성 사이의 연관성을 구체화시킨다. 이 때 공간은 적막한 무의미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의 흔적을 품고 있는 ‘존재의 공간’으로, 몸의 역사를 증거하는 ’서사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김옥선에게 몸은 공간의 역사를 담고 있는 몸이며, 공간은 죽어있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의 탄생을 돕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4. 그 곳에 있는 그녀를 우린 어떻게 알아보나

김옥선은 여성들의 벗은 몸을 보여준다. 그 몸은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과 공중목욕탕에서 늘 마주치는 엄마와 언니, 동생, 동네 아줌마 그리고 내 몸과 다를 것이 없다. 그 몸은, 우리가 접하는 시각문화 속의 여성의 몸과는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서구 시각문화 전통 속에서 여성의 몸을 드러내게 하는 일은 남성의 역할이었다. 오랫동안 여성의 신체를 재현하는 일은 남성의 특권적 영역에 속했고, 여성의 벗은 몸은 남성의 보는 즐거움을 위한 구경거리spectacle, 남성 예술가들의 자의식과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다.11) 남성 중심적인 시각문화 속에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는 늘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 즉 성 계급, 인종, 노동 그리고 예술에 대한 남성들의 지각형식을 드러냈다. 남성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 여성의 육체는 사실상 시각문화에서 배제되었다.12)

대중매체를 비롯한 남성 중심적인 시각문화 속에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 대부분은 여성들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이나 사회 경제적인 위치, 문화적인 배경은 무시한 채 여성의 역할을 몇 가지 제한된 이미지로 구분해놓은 ‘시각적인 원형’13)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시각적 원형은 단지 미의 이상을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행동규범으로 내면화되어 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문화 속에서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은 얼마나 관음증적인 시선과 물신적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남성적 응시의 대상으로 여성을 바라보아온 기존의 시각적 재현 방식을 해체하려는 여성주의 미술 내부에서도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은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재현하는 것이 남근적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도 있다. 또 다른 입장은 남성적인 시선을 전복시키고 여성이 새로운 육체 담론을 이끄는 주체가 되기 위해 여성 신체의 새로운 재현 방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14)

김옥선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다. 남성 중심의 시각문화를 지지해온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을 여성들 자신이 ‘재현하면서’ 남성의 시각적 이미지 통제방식의 해체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리가라이는 이 같은 ‘모방mimeticism’의 전략을, 여성을 착취해온 담론의 영역에서 여성의 자리를 되찾은 전복의 전략이라고 평가한다.15) 일종의 내파 전략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버거Berger는 <보는 방식>(1972)에서 성별화된 시각 양식의 개념으로 ‘시선’의 문제를 제기하며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남성 관객 또는 남성 관음자의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녀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여성은 남성적인 시선의 수동적 대상에 놓이며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해 자신을 관찰하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행위로 보일 수 있는 시선 자체에 권력 관계가 내재해있다는 의미에서 ‘시선-권력’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16) 버거는 ‘시선- 권력’의 효과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로 설명한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문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 관객은 남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 관객을 즐겁게 하도록 고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선-권력’의 작용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차별화’되는 과정이라고 말해야할 것 같다. 셩별화된 시각양식이 구조화되는 과정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의 이미지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실 여성들의 경험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정되는데 반해 남성들의 이미지는 현실의 다양한 남성들을 재현한다. ‘시선- 권력’의 또 다른 효과는 ‘동질화’ 과정이다. ‘이상적’ 관객인 남성의 시선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동질화되고, 여성들 내부의 차이(사회적 지위, 인종, 계급 등)의 흔적은 지워진다.

여성들의 현실의 몸은 구체적인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단일한, 완벽한 이상적인 몸’이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몸들로 존재한다. 현실 여성들의 몸의 다양한 존재 방식과 공간적인 맥락을 추상화시키는 것이 바로 ‘시선-권력’의 힘이다. ‘시선-권력’은 현실의 다양한 몸들을 균질화된 추상적인 공간, 완벽한 신체, 표준화된 이미지로 가둔다. ‘이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미의 균질화를 초래한다. 주변에서 접하는 현실의 몸과는 거리가 먼, ‘이상화된’ 몸, 아름다운 몸의 표준적인 기준을 설정해놓고, 다이어트와 성형에 목숨을 걸고 있는 여성들을 떠올려보라.

김옥선은 또 다른 시선의 존재를 제기한다. 버거의 주장처럼 여성은 남성적 응시의 수동적 대상만은 아니다. 여성은 시선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보는 자이다. 여성들의 시선의 존재 또한 인정해야 한다.17) 그런 맥락에서 ‘시선-권력’의 주체 또한 단일한 주체로 환원될 수 없다. ‘현실의 다양한 몸들’이 ‘단일한 몸’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김옥선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문화 주변을 떠도는, 흩어져있는 여성들의 시선이 발견한 여성들의 ‘현실의 다양한 몸들’을 드러낸다.18) 여성들의 경험과 사고, 삶의 흔적이 깃들인 현실의 몸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여성의 신체는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남성적 응시의 작용점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주체적인 삶을 모색하는 저항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 또한 남성의 시각적 이미지 통제를 강화시켜 주기도 하지만 ‘차이’의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옥선은 여성 신체의 새로운 재현 방식을 위한 ‘차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5.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 있다.

김옥선은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에서 코드화된 방식을 해체한다. 그 방식을 메이플소프Mapplethorpe의 작업과 비교해보자. 메이플소프는 전통적인 예술 사진 속에서 남성, 흑인 게이의 신체 권리를 주장하며 신체 표현의 고전적인 규범의 틀을 해체한다.19) <Lisa Lyon>(1980)에서 메이플소프는 이제 여성에게도 그 권리를 부여한다. 잘 다듬어진 근육질 여성이 고대 조각상을 재현하며 영웅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힘과 강인함을 드러내는 여성의 몸은 분명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보디 빌딩으로 잘 관리된 사진 속 여성의 몸처럼 메이플소프는 여성의 신체를 또 다른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메이플소프는 공간적 맥락이 추상화된 절대 순수 공간을 상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도와 색채의 톤, 명암의 교차, 포즈 등을 철저히 고려해 셋팅된 완결적인 공간에 메이플소프는 여성의 몸을 가둔다. 모델이 된 여성은 그의 구도에 따라 자신의 몸을 내맡긴다. 여성의 몸은 그의 예술적인 상상력을 투사하는 대상이며 남성 예술가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텅 빈 스크린일 뿐이다.

남성 예술가와 여성 모델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메이플소프의 작품 속에서 남성 모델 또한 셋팅된 공간에서 도식화된 포즈를 취한다. 작가와 모델 간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물론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 남성 예술가와 개별 여성 모델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서구 시각문화 전통 속에 드러나는 ‘성별의 구조화’이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남성/여성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시각문화 영역에서 남성/예술가와 여성/모델이라는 또 다른 위계적인 대립으로 구조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옥선의 방식은 어떠한가. 김옥선은 먼저 정사각형 프레임으로 안정되고 정적인 구도를 만들어낸다. 프레임은 ‘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특정한 방식으로 닫힌 공간적 프레임을 가정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현실 세계와 격리된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연결된 공간이며 완결적인 어떤 공간이 아니라 현실과의 연결을 놓치지 않는 ‘맥락적인’ 공간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김옥선은 작위적인 구성이나 과장된 표현 없이 여성들의 몸을 프레임에 담는다. 그들을 특별한 모습으로 담으려 하거나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김옥선은 여성들이 머무는 집을 찾아간다. 방문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곳이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의미의 공간’이라는 것을, 빈 집이 아니라 누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여성들의 존재를 그저 집을 지키고 있는 ‘아줌마’가 아니라 ‘의미있는 존재’로 위치시키려 한다. 그들의 몸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알린다.

공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 김옥선은 완전히 낯선 타인이다. 조명 상태가 좋을지, 배경은 어떨지, 공간은 제대로 확보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그 안으로 들어가 여성들에게 일상적인 그러나 사진가에게는 완전히 낯선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몸을 찾아낸다. 그것은 마치 상황을 모른 채 간단한 도구만 챙겨 들고 집으로 찾아가 산모를 도와 아이를 받아내는 산파의 역할과 흡사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몸을 붙잡는 것이다. 매 순간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몸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이다.

김옥선은 실제 크기의 몸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96년 개인전에서는 50x50cm 정도의 크기였는데 최근 작업에서는 100x100cm 정도를 고집하고 있다. 이 정도의 크기의 사진을 바닥에서 60cm 정도 올라간 높이에 설치했을 경우, 사진 속 여성의 실제 키와 비슷해보인다. 왜 그는 온전한 형태의, 실제 크기의 몸을 고집하는가?

공간은 물리적인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정치범들이 투옥되는 것으로 알려진 교도소 내 독방 크기는 공간의 면적과 개인의 공간적 경험 사이의 연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0.75평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은 그에게 허용된 정치적 자유의 한계이며, 신체의 자율성에 대한 구속의 정도를 나타낸다. 이렇듯 공간의 면적은 공간적인 경험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김옥선은 사진 속의 여성들이 느끼는 공간의 경험을 보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공간에 머무는 실제 크기의 여성의 몸을 보여준다. 이는 사진 속 여성이 공간을 경험한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도 그 공간을 체험하길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온전한 몸을 그대로 담은 것은 공간과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living’ 몸을 보여주는 의도로 해석된다.

파편화되고 분할된 신체 이미지는 여성을 대상화한 남성적인 응시의 전형적인 재현 방식이다.20) 남성적인 응시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신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신체가 아니라 차가운 응시와 관찰의 대상이 되는 해부학적 신체로 격하되곤 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나 키키 스미스Kiki Smith 같은 여성주의 작가들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억압과 훈육의 실체를 절단되고 파편화된 해부학적 신체로 재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21) 김옥선은 온전한 여성의 신체를 재현하면서 해부학적 시선이 방기한 여성의 신체를 복권시킨다. 이는 여성의 몸을 위한 공간을 온전히 확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율성, 몸의 통합성을 회복하는 것은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울프Virginia Woolf가 여성의 정신적인 독립과 주체적인 삶을 위한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