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정치-김옥선
정형탁
김옥선의 사진은 언뜻 무미하고 건조해 보인다. 기록의 속성으로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관점에선 무미하며 어떠한 내러티브나 작가의 감수성(감수성? 이 얼마나 추상적인 개념인가.)이 배제되어 보인다는 점에서 건조하다. 그러나 그건 ‘언뜻’ 그렇다. 설핏설핏 그렇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품은 많은 시선의 층과 이야기 층이 산재하고 겹친다. 다큐멘터리의 기록성을 전유하지만 기록과 증거로서의 사진은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작가는 스스로 철저하지 않다고 말한다.-연출된 이미지다. 이미지는 느슨하지만 작가가 사진으로 말하려는 언술은 단단하다.

시선이 머무는 자리
김옥선의 7번의 개인전에서 필자가 본 건 3개다. 필자가 본 건 3개지만, 사실 김옥선의 작품들은 운좋게도 이 3개의 전시로 구분될 수 있다. 1996년과 2000년도에 발표한 <Woman in a Room>시리즈, 국제결혼과 동성 커플을 다룬 2002년도의 <Happy Together>시리즈,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08년도 금호미술관에서 했던 제주도의 외국인 시리즈인 <함일의 배>정도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세 시리즈를 편의상 <방>, <결혼>, <배> 시리즈로 명명한다.)
1996년 샘터화랑과 2000년 타임스페이스에서 전시 했던 <방>시리즈는 옷을 다 벗은 일상의 여자들이, 자신들의 공간인 방이나 부엌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다. <방>시리즈의 사진들은 무덤덤하다. 무표정의 벗은 몸이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렇고 인물이 서있는 배경이 일상의 공간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 무덤덤함에는 어떠한 미학적 가치들이 배제됨으로써 관음증적인 시선을 탈락시키는 것 같다. 벗겨진 것보다 스스로 벗음이 강조된 듯한 여성, 삶의 흔적이나 상황이 말끔하게 정돈되고 포장된 듯한 공간의 무표정이, 아마도 많은 응시적 주체들의 시선과 맞서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을 작가의 여성주의적 시선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부인하고 있지만 <방>시리즈는 일정 정도 여성주의적 시선으로도 읽힌다. 그렇지만 그건 일정 정도에 한해서다.

벗은, 일상의, 누나나 언니, 혹은 아줌마의 몸이라는 쪽에 관심을 더 둔다면 초역사적 실체로서 여성성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여성주의 시선에 가까운 해석이 될 테고, ‘발가벗은 육체성의 현실과 그 육체가 거주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곳에 관심을 둔다면 오히려 여성주의의 시선을 일부러 멀리했다는 해석에 가까울 테다. 또 여성의 일상과 거처로서의 방을 억압의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을 테고 반대로 (자발적으로)벗은 몸이 오히려 이러한 억압의 공간을 해방시키는 몸짓으로도 읽을 수 있을 테다. 시선은 벗은 몸과 방의 이곳저곳을 오간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떨어져 냉정하게 찍었다고 말하지만 과연 텍스트(사진) 밖엔 아무 것도 없을까. 어쨌든 여성주의적 시선의 안과 밖을 오가는 게 김옥선 작품 전반에 풍겨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는 점은 지적해 두자.

<결혼>시리즈 역시 이러한 두 가지 시선을 겹쳐 읽을 수 있다. ‘외국인과 결혼한 국내 여성’들을 찍은 이 시리즈는 국제결혼을 한 남녀의 모습(2002년, 대안공간풀)이나 2004년 뉴욕 PS1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후 찍은 미국 내 국제결혼 커플과 동성커플(2004년 뉴욕한국문화원과 2005년 마로니에미술관)이 피사체다. 스스로 국제결혼자인 작가 자신의 시선이 투영된 사진은 결혼한 부부와 그들이 사는 공간을 프레임에 담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아마도 여자들의 시선일 것이다. 사진 속 여자들은 모두 관객, 그러니까 렌즈를 응시한다. 그리고 이 응시 역시 앞서 이야기한 ‘주체적 시선’의 담론, 그러니까 여성주의 담론에 포섭된다. 모든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러니까 텍스트 밖을 응시하는 작품이 다 여성주의 담론으로 읽히는 건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나 <세느강에서의 일요일 오후>에 등장하는 여성의 시선이 그러하다. 이들 역시 모두 프레임 밖을 응시하고, 이전에 없었던 여성의 주체적 시선이라고 해석하는 예도 있지만, 마네가 이러한 작품 앞뒤에서 여성주의적 시선을 염두한 건 없다. 오히려 이들의 응시는 당시 유행했던 카메라적 시선, 즉 도시 소요자(flâneur)가 유유자적하면서 포착한 수동적인 피사체의 시선으로 읽는 게 온당할 것이다.
<결혼>시리즈에서 여성의 시선이 강조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웃하고 있는 남성의 시선 때문일 수 있다. 작품 속 여성은 관객을 응시하고 있지만 남자, 그러니까 남편들은 모두 관객의 시선을 피한다. 관객의 시선을 피한 남편들은 자연스럽게 아내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사진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관객(작가)이라는 세 개의 시선으로 완성되는데, 만약 시선을 고리타분하게 욕망 혹은 권력의 상징으로 읽는다면 이 시선의 싸움터에서 승리자는 아내들인 것이다. 아내들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적이다’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작가의 시선을 재현의 욕망으로 읽는다면 사진 속 여자들의 시선 속에 이미 작가의 시선이 포개진다.

다큐먼트의 전유
2008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인 <함일의 배>시리즈(이하 <배>시리즈)는 제주도에 사는 외국인을 소재로 삼았다. ‘함일’은 350여 년 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의 한국명이다. 하멜의 13년 동안의 제주 표류는 작가의 13년 제주 생활과 겹친다. <배>시리즈는 유학생, 주재원, 특파원, 장기 체류 여행자의 신분으로 제주에 머문 외국인을 기념사진의 형식으로 찍은 것이다. 1년 동안 찍은 사계절 제주도 풍경은 기념사진의 배경이 그렇듯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곳이거나 방문했던 곳을 소재로 삼는다. 350년 전 하멜이 그토록 떠나고자 했던 이국에서 이들은 무척 동화된 듯 하며 심지어 한국의 토속 풍경과 밀착되어 토착화되어 가는 듯 보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표류한 제주도가 하멜에겐 떠나고자했던 곳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자유롭게 표류하는 공간인 것이다.
‘목적이 고착되고 정형화된 삶’이 유목주의가 아니듯 자유로운 표류가 꼭 유목의 삶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고유한 문화적·언어적 맥락에서 떨어져나가 오히려 작가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러니까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적·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을 제주도라는 풍광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마치 사회과학의 한 방법론인 민속지학적(ethnographic)인 방법을 택한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민속지학의 기본적인 방식을 따라 인물들이 좋아하고 이전에 갔던 장소를 선택하는 방식은 ‘응시와 관찰’이라는 사회학적 방법을 전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그 이전 시리즈에서도 줄곧 지켜온 것이다.

그가 선택하는 응시와 관찰은 삶의 다양한 층위, 복합적인 현실을 건드리고자 선택하는 방식이며 이는 다분히 텍스트로서 사물을 대하는 다큐먼트의 성격을 닮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이상적인 미학에 기대는 예술사진의 관념’의 산물이 아닌 ‘자료로서의 사진과 예술로서의 사진의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통 미학이 애호하는 개성과 이념의 표현, 감정이입, 주관성의 개입이라는 전통적 예술성의 조건들’을 배제하고 ‘가치판단의 보류, 자료의 엄정성, 의학적 냉정함’에 기댄다. 응시와 관찰이라는 다큐먼트의 형식만을 전유할 뿐이다.

김옥선의 작품은 응시와 관찰의 기록적 속성을 ‘구성적 프레이밍’을 통해 보여준다. 날 것의 기록이 아니라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익명적일 수 있는 외국인을 제주도 풍경이나 인물들과 동화되게끔 구성하는 것이다. 여행과 관광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지 않던 제주도의 외국인이 그의 프레이밍으로 인해 정체성을 획득하는 지점에서 작품은 미학적 정당성을 얻는다. 여기에 작가 자신이 가진 문화적 배경-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은 해석적 층위를 더 넓힌다. 사진은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기록에서 ‘타자의 시선’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
미술에서 외국인을 소재로 삼기 시작한 건 90년대 말 부터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외국인이 국내에 없었던 건 아니다. 89년 여행자유화 이전에도 국내에 외국인은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외국인이 있거나 증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에 외국인이 많아지진 않는다.
외국인이 작가들의 시선에 포획되었다는 건 타자에 대한 의식의 탄생과 관련 깊다. 무엇보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급속한 신자유주의 체제 전환 역시 이러한 타자의 시선을 다층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무렵 이후 시각문화 전반에 걸쳐 탈식민주의, 페니미즘, 소수자 담론이 등장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인식은 결국 자신이 처한 사회문화적 배경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해외여행과 교류,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시간의 압축을 통해 외국인이 처한 국내적 상황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늘 거기 있었던 타자가 내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김옥선은 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타자의 시선을 염두한다. ‘타자의 시선’은 자아의 출현을 의미한다. 작품 소재인 여성의 일상(<방>시리즈), 외국인과 결혼한 여성(<결혼>시리즈), 해외에선 늘 타자인 외국인들(<배>시리즈)의 경우는 그래서 고스란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실재의 단순한 재현은 항상 실재에 대해서 적게 말해줄 뿐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사진에서 어떤 것은 실제로 구축되어야 하고, 어떤 것은 인공적이 되어야 하며, 어떤 것을 설정되어야 한다.”
벤야민의 변론을 따라 실재가 구축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작가는 훌륭하게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작품이 ‘구성된 사실’일지라도 현실의 실재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구성된 사실이 거짓이거나 인위적이지 않을 수 있는 지점이 여기 있다. 여성의 힘든 일상,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에 대한 불편한 시선, 언제든 타자가 될 수 있는 이방의 외국인들의 삶이 현실 상황을 부정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다 타자의 시선을 작가의 시선과 겹쳐 읽는다면 좀 더 확장된 해석의 영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가령 여성, 일상, 공동체와 윤리 등.


작가 김옥선(1967〜)은 1996년 샘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포함하여 7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2003년 PS1국제 스튜디오 프로그램 참여작가(한국문예진흥원), 2007년 제6회 다음작가상(박건희문화재단)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제주 서귀포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_정형탁(계간 컨템포러리아트 저널 편집장)_컨템포러리아트 저널 Vol.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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