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날려온 종려나무 씨앗
김승곤
“Beautiful as the fortuitous encounter of a sewing machine and an umbrella on a dissection table." - Lautréamont, Les chants de Maldoror
''해부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과 같은 아름다움'' -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 사진집은 종려나무 사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손에 수박을 들고 화강암 바위 위에 어정쩡한 자세의 여성들로 마무리 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집합을 이룬 상태에서도 심리적으로는 분리된 인상을 준다. 사진의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한 제스처와 그들 사이의 애매한 거리감으로 인해 희박한 관계성을 느끼게 만든다. 섬 고유의 눅눅한 대기와 채도가 낮은 광선 가운데 자리 잡고 서 있는 이방인들을 찍은 기묘한 느낌의 설정에서 우리의 감각은 잠시 초점을 잃고 사진 위를 방황하게 된다. 한국 최남단의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년 평균기온 15℃의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이 섬에는 2010년 현재 44개국 7,400여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다. 제주도 주민 80명에 한 명 꼴이다. 김옥선은 그들 가운데에서 주로 미국과 캐나다, 호주 같은 영어권에서 온 외국인들을 모델로 해서 찍고 있다. 영어교사나 비즈니스, 지역소식지 편집, 여행사, 스킨스쿠버 다이빙 인스트럭터, 환경운동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산, 온난한 기후와 깨끗한 공기 같은 자연의 매력에 끌려서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이라면 다른 곳도 얼마든지 있다. 김옥선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지만, 적당한 사건이나 장소를 찾아서 찍는 그런 사진가와는 다르다. 면밀한 컨셉을 짜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 - 장비 선택에서부터 장소, 표현방법의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 가운데에서도 모델을 선정하는 일은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주로 가깝게 지내는 외국인 친구들이나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모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과의 사이에 작업의 주제와 촬영 의도, 작업 방법 등에 관한 충분한 이해와 합의가 이뤄진 다음 촬영에 들어간다. 제주도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거나 그들의 일하는 장소, 생활공간이 스튜디오다. 그는 모델을 선정할 때 그들이 자신의 작업 컨셉에 맞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중시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심의 삶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한 달 동안 혼자서 헤엄을 쳐서 제주도를 일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서 영어교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적인 통제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렇게 해서 보장되는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데 만족해야 한다. 김옥선의 사진에서는 자신이 속해 있던 장소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보더레스 피플의 자유로운 영혼을 볼 수 있다. 150mm를 단 4×5 카메라와 삼각대라고 하는 둔한 장비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내건 야외건 그녀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시추에이션을 잡은 사진에는 스냅 샷의 요소와 연극조의 연출된 포즈가 섞여 들어 있다. 반신이나 더러는 클로즈업도 있지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프레임을 채운 전신사진이 기본이다. 거실이나 침실, 다이닝룸 같은 일상적인 생활환경이 대부분 겨우 삼각대 다리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공간이어서, 150mm의 표준렌즈로는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모델들을 마치 도감의 표본사진처럼 찍고 싶다는 그의 의식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도감은 대상의 개인적인 인상이나 미적 감각이 개입되지 않고 대상의 외관적인 특징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크고 불편한 장비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는 촬영에서 그는 모델에게 카메라를 의식한 표정이나 꾸며진 웃음 같은 것을 보이지 말아 달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의상을 입거나 포즈를 취하라는 주문을 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꾸며지지 않은 뉴트럴한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이 사진에 어떤 식으로 찍히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모델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렌즈를 향해서 자신이 보여 지기를 원하는 표정과 포즈를 취한다. 그들은 현실적인 콘택스트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서 가장 자신다운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려고 한다. 거기에서는 거의 표정이 없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개인적인 기호나 취향, 심리상태 같은 것들을 얼마쯤 유추할 수 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동을 비쳐내는 인간의 표정은 강력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웃음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김옥선은 모델의 얼굴에서 표정을 소거함으로써 그들을 익명화시키고, 그들이 주체적인 감정을 제어하고 있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사진가가 단지 그 존재를 목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사진 속에 은밀하게 짜 넣고 있다. 식물처럼 움직임 없는 무표정한 이들을 보며 우리는 일순 판단 정지(epoche)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지의 시스템을 정지시킴으로써 순수한 의식으로 이들을 체험시키려고 하는 그의 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른 단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진집의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우리는 사진가가 들여다보도록 지시한 인물의 외관에 관한 정보뿐만 아니라 이 사진의 배경을 이루는 주위의 사소한 것들에 눈을 돌려 관찰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게 된다. 헬멧을 쓰고 빨간 윈드브레이커 속에 짧게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 슬립퍼를 신은 발, 스쿠터 앞에 냅색을 벗어놓은 알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벽에 걸린 액자, 바닥에 엎드린 강아지들, 탁자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쌓인 책, 돌하루방, 작은 화분들, 헬스 기구, 옷가지, 지구본, 벽에 걸린 동양화, 놋쇠가 붙은 장식장 위에 놓인 TV …, 그리고 커튼과 소파. 한국의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몇 가지 것들이 그들의 ‘가정’을 꾸미는 조도품의 거의 전부다. 그것은 이들 대부분이 이 토지의 정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델들의 배경으로 배치된 이런 물건이 물론 제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생활에 대한 몇 가지의 유형적인 패턴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김옥선이 제시하려는 것은 물론 그런 일반적인 정보들이 아니다. 그는 마치 로르샤흐의 심리테스트처럼, 이들 텍스트 안에 짜여 들어있는 의미의 파편들을 능동적이고 선택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우리가 ‘가정’이라고 하는 제도 자체를 투사시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사진적 장치(Mise-en-Scène)들로서 구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 - 본래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진 사람들이 있다. 스티브는 거실과 주방이 분리되지 않은 실내 바닥에 맨발로 앉아 있다. 퍼터와 골프공, 싱크대 위에 놓여 있는 전기 밥솥과 포도주 병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들과 스티브가 자리한 비논리적인 상황이 빚어내는 이화(異化)와 모순을 데페이즈망 이외의 어떤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국 취향의 리사, 여기저기 걸려 있는 옷가지들, 젖이 흐르는 강과 양떼와 예수가 인쇄된 싸구려 액자, 비닐 봉투와 믹서와 신발들이 산란한 시멘트 바닥 위에 맨발을 딛고 앉아 있는 크리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금 걸터앉은 문턱은 외부와 거실과의 경계가 애매한 분화(分化)되지 않은 장소다. 아랍 의상을 몸에 두른 크리스의 의식은 자신이 위치한 현실의 장소를 떠나 어딘가 먼 곳을 떠돌고 있다. 이들의 시선에서 그들만의 농밀한 시간의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단지 카메라의 렌즈를 뚫고 우리 가슴에 와 닿는 강한 눈빛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 현대의 유랑민들이 점유하고 있는 이국의 공간에 떠도는 멜랑코릭한 분위기가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팔을 밑으로 떨구고 의자에 앉은 멜라니, 단정하게 두 손을 앞에 모은 캐서린, 빨간색 커튼을 배경으로 붉은 앞치마를 두른 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김옥선의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얼굴에는 거의 표정이 없거나, 아니면 꿈꾸는 듯 아련한 표정만이 떠있다. 감정이 표백된 듯 한 표정은 그러지 않아도 읽을거리가 적은 실내를 한층 더 중립적인 풍경으로 만든다.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을 어렴풋한 감정의 움직임을 우리는 극히 제한적인 단서들을 통해서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표준렌즈와 대형 필름의 입자들이 그려내는 디테일한 묘사, 투명하고 부드러운 인공광에 드러난 모델들의 표정에서 사진가가 이 작업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대폭 절제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백한 광선을 전신으로 받고 서있는 린지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벗어나 어딘가 다른 시공간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의자에 앉은 쉐린, 스티브, 마리카, 필립과 베로니카들은 검은 돌담 뒤에서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뿌리를 내린 종려나무와 뒤엉킨 넝쿨식물, 4. 3사건 당시의 유해 발굴 현장 뒤쪽으로 보이는 비행장들과 함께 어느 것이나 제주라는 풍토의 맥락 속에서 등가의 풍경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누구일까? 실내에 놓인 최소한의 간소한 살림,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이들을 보며 보헤미안(bohemian)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19세기말 전쟁과 인종차별,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서 고향을 떠난 유럽인들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나, 너무 오랜 그런 생활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떠난 자유로운 사고와 삶의 방식이 있다. 성격도 시기도 그들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기성의 체제와 가치관으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보헤미안이나 반세기 전의 히피(hippie)와 동질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긴 수염과 긴 머리를 하거나 팬던트를 목에 걸고 있지는 않지만, 테크노크라시와 이성에 대한 불신과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주류문화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갈망은 이 시대의 보헤미안들에게도 공통되는 속성일 것이다. 모국을 떠난 이들 새로운 유형의 유랑민이 제주도를 선택한 동기를 추이해볼 수 있는 단서를 거기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오래 전, 풍랑에 떠밀린 상선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은 10년이 넘는 억류생활 끝에 겨우 탈출해서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는 절실하게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었다. 지금 하멜이 표착한 섬에 머물고 있는 21세기의 신 자유민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부여했고, 소박한 생활과 지적인 일과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면서 살아가려고 이곳에 들어왔다. 이들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잠시 동안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려는 여행자도 아니고,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도 아니다. 여성(의 누드), 외국인과 결혼한 커플들, 드롭 아웃으로서의 동성애자…. 처음부터 김옥선은 왜 그처럼 집요하게 이들 마이놀리티 그룹에 초점을 맞춰 찍어오고 있는 것일까? 그녀 자신이 외국인과 결혼한, 어떤 의미로는 문화적인 이방인이라는 것이 시사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다루고 있는 집단의 입장이나 태도는 현대사회의 권력구조 안에서 여전히 차별 대상이거나 소수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김옥선의 사진은 바로 이런 사회적 편견과 규범, 가부장적인 제도,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는 단순한 설정의 장면들을 통해서 그가 면밀하게 계산한 피사체의 선택에서부터 포즈와 표정, 의상, 표백된 듯한 중성적인 컬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각적 정보들과 함께 그들이 가진 기호와 상징성,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많은 요소들을 읽어낼 수 있다. 김옥선은 지금까지 해나온 일관된 작업의 집적을 통해서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이야기, - 마이너리티라고 하는 명제에 대한 전체적인 네러티브를 그려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거리가 하루로 좁혀진 지금은 타자로서의 동방의 나라는 없다. 꿈과 보석과 환상으로 가득 찬 신비의 왕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활을 위한 몇 가지의 실용적인 이유와 함께, 이들의 무의식 가운데에 분명 동쪽 끝에 위치한 이국의 미지의 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이 얼마쯤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양반다리를 하고 거실에 앉은 유진의 가족들이나 두 발을 꼬아 모은 채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나, 그리고 실내에서 맨발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이 토지의 생활 방식이나 사람들의 생각에 순조롭게 이들이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종려나무를 보자. 이 열대성 나무는 원래는 일본의 따뜻한 남쪽 섬이 원산지인 외래종 식물이다. 아마 계절풍을 타고 씨앗이 바다로 흘러 들어왔거나, 아니면 열매를 따먹은 철새가 하늘로 씨를 날아왔을 지도 모른다. 바람을 타고 와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국의 토지에 뿌리는 내린 종려나무…. 이국정취(exoticism)를 연출하는 상징물로 제주의 풍토에 뿌리를 내린 이 아름다운 나무가 김옥선이 그려내고 있는 현대의 유랑민들, - 마이놀리티 그룹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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