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빛나는 것들
이영욱
괴물들은 지하세계에서 나타나고
이방인은 미지의 세계로부터 침략해 들어오지만
신들은 대개 우리를 뛰어넘는 다른 세계 안에 자리 잡고 있다

- 리처드 커니


1.
근 10여 년간 이방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왔던, 김옥선이 이번에는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제주 특유의 종려나무가 피사체의 주종을 이루지만, 또 다른 나무들과도 만날 수 있다. 외따로 혹은 같이 서있거나, 숲 속에 혹은 일상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나무들... 자신이 생활하는 장소 어간의 정경을 좀 더 차근히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그녀는 사물들 혹은 그 사물들이 내뿜는 빛의 반짝임을 하나씩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이방인을 소재로 한 김옥선의 이전 사진에는 국제결혼 한 부부, 게이커플, 그리고 영어교사, 비즈니스맨, 여행사 직원, 요가선생 등의 직업을 가진 방문객, 임시거주자 혹은 영구이주자 같은 다양한 외국인들이 등장한다. <해피 투게더>(2002)는 이 일련의 작업들 중 맨 처음 것인데, 백인 남성과 아시아계 여성 부부를 찍은 연작이다. 이 연작이 흥미로운 것은 통상적 관례를 빗겨나 초점이 관객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인 듯싶다. 사진 속 아시아계 여성은 정확히 관객을 바라본다. 남편과 함께 있는 일상의 한 순간을 내보인 장면 속에서 그 여성(들)은 관객을 주시한다. 당사자로서는 예사롭지만 제한된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감각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면에서, 그 여성들은 마치 “이 삶이 당신들의 삶과 다른가?” 라고 묻는 듯하다. 호기심과 관음증, 환상과 편견에 의해 한정된 관객의 시선은 이곳에서 일종의 감각적 파열을 경험한다. 미묘한 상황포착과 절제로 인해 낱낱이 응집된 장면의 세부들은 관객의 시선을 혼란에 빠뜨리며, 국제 가족 특유의 디테일들이 발산하는 혼성의 세계는 관객의 시야를 덮고 뒤흔들어 버린다. 이 사진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시선과 감각을 재구성하고, 이 혼성의 삶과 일상을 수용하는 열린 시야를 획득하도록 강제한다. 그렇다면 이 사진들에 가장 적합한 관객은 민족주의와 순혈주의, 가부장 제도에 의해 훈육된 사람들, 이방인에 대한 배타의 감각 및 공포의 시선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3.
작품집 <함일의 배>(2008)와 <No Direction Home>(2010)에서 작업의 초점은 관객으로부터 소재가 되는 대상, 인물로 이동한다. 이 연작에는 제주에 거주하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외국인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눈은 다른 무엇보다 이질적인 개체(들)의 삶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함일의 배>는 각각의 인물들이 집밖 공간에서 그들이 자주 행하며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도중의 한 순간을 기록한다. 예를 들어 셀리는 산책을 하다 잠시 제주의 골목 담에 기댄 모습이고, 리치는 홀로 수영하고 나온 작은 해변에서 바다 저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브라이언은 검도 연습 중간에 낮은 언덕으로 펼쳐진 경사면을 배경으로 촬영에 임한다. 제주 특유의 이국적인 풍광과 생활공간을 배경으로, 그들은 이방인이자 또한 경계를 가로지른 자유인으로서 스스럼없이 일상의 자신을 내보인다. 작가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본다. 이 사진들의 표면 위로는 마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떠돌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이곳. 낯선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나에게 누구인가?” 하지만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떤 명확한 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선택한 낯선 이곳에서 꿈과 기대를 갖고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이방인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방인이듯이 우리는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단지 차이만 있을 뿐... 그리하여 이 사진들의 전언傳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듯하다.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 또한 실은 친숙하지만 낯선 이곳에서 누군가에겐 이해되기 힘든 방식으로 나름의 꿈과 기대를 갖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4.
<No Direction Home>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함일의 배>에서와는 달리 바깥 공간이 아닌 집안의 의자나 침대 등지에 앉거나 서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연작에서 눈에 띠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을 마치 도감圖鑑사진에서처럼 최대한 표준화된 프레임과 촬영방식에 맞춰 철저히 압착하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는 인물의 몸 전체가 화면에 꽉 차는 정도에 동일하게 맞춰져 있으며, 조명 또한 균질하여 화면 안의 콘트라스트를 거의 사라지게 만든다. 따라서 인물과 배경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지며, 화면 안 공간은 평면화된다. 또한 인물의 표정에서 가능한 한 주관적 표출이 억제되며, 배경의 소품들 또한 최소한으로 단순화된다. 나는 이 같은 시도가 객관화. 균질화, 표준화, 단순화를 통해서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 아니 그렇게 밀어붙임으로써 비로소 가시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착하고 노출시키려는 (무)의식적 의도와 관련이 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보자. 작품집 표지에 실린 <멜라니melanie>(2009)에서 우리의 눈은 그녀의 이국성이나 혹은 그것이 이곳 문화의 디테일들과 뒤섞여 만들어내는 혼성적 특징에 머물지 않는다. 사진은 이 층위 너머의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하다. 이방인이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투사의 결과다. 초점은 따라서 이 이방인과 우리,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그리고 낯선 것과 친숙한 것을 가르는 경계, 그리고 그 경계 구성의 근거가 되는 지각과 감성의 스크린에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스크린 너머에서 다른 어떤 것이 스며 나온다. <멜라니>에서 그 어떤 것, 라깡에 따르면 실재Real에 해당하는 것은, 그녀의 머리 왼쪽 옆 뒤편의 어스름한 빛이 극도로 단순화된 화면의 팽팽한 긴장, 혹은 그녀의 얼굴, 급속히 줄어드는 다리의 형태 왜곡, 실내화 바닥 등과 더불어 빚어내는 어떤 빛의 흐름 혹은 울림이다.

5.
김옥선의 이번 나무사진은 어떤 발견 혹은 만남을 기록한 느낌을 준다. 그 나무들이 위치한 곳은 외딴 들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 속, 흔한 일상 공간 어딘가의 구석 같은 방치된 혹은 그저 지나쳐 버리게 되는 그런 장소들이다. 다시 말해 주변이다. 나무들 또한 주변적이다. 그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거나 어떤 상징성을 체현하고 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그곳에 그렇게 있다. 장소에 붙박여, 고정된 채, 어떤 꾸밈새도 없이, 주어진 환경이 수여한 모습 그냥 그대로 있다. 하지만 사진 속 나무들 하나하나는 어떤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아니 그들이 반짝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옥선은 이 반짝임을 발견하고, 그것과의 만남을 기록한다.

6.
흥미로운 점은 이 나무사진들이 인물사진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하긴 촬영방식이 유사하다. 거의 대부분의 나무는 전신 크기로 화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초점은 배경보다 나무의 몸체에 맞춰져 있으며.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나무의 키에 조율되어 있다. 물론 약간의 변주가 없을 수는 없다. 이런 방식은 <No direction Home>의 인물배치를 연상시킨다. 또한 나무가 화면 안에 배치된 방식 몇몇은 <함일의 배>의 사진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과 나무가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이 나무들이 일종의 의인화된 형상을 연상케 하는 지점이다. 어떤 경우는 사람의 얼굴표정, 어떤 경우는 상황 속에서 사람이 취하는 태도나 자세, 어떤 경우는 사람 혹은 여타의 존재가 내뿜는 기운 같은...
논의를 위해서는 종려나무와 그 나머지 경우를 나눠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종려나무의 경우는 사진 속 나무의 형태가 사람의 얼굴표정이나 상황 속의 태도 같은 것을 상기시킨다. 그 밖의 나무의 경우는 두 가지다. 한 유형은 주로 특이한 형상을 가지 존재나 그것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다른 유형에서는 숲속의 나무와 여타 사물들의 어우러진 형태가 일종의 영기靈氣같은 것을 감지하게 한다.

7.
일상 공간 속의 종려나무 사진에서 나무는 골목 언저리, 집 뒤켠, 혹은 텃밭이나 공터 옆 같은 장소에 숨겨진 듯 자리 잡고 있거나, 돌담이나 지붕 위, 마을 어귀, 비닐하우스 옆으로 긴목을 내밀고 돌출해 서있다. 몇몇 나무는 마당 한 가운데 혹은 거리와 맞닿은 가로변 같은 그럴듯한 장소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흔히 화면의 배경으로는 전기줄이 나무의 몸체 위나 혹은 그 중간을 가로지르곤 한다. 나무들은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방치되어 있는 듯 보인다. 아니 마을과 도시 공간 속에서 이들은 마치 이방인처럼 서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장소와 이들의 모습 자체는 더 없이 주변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까이 사진들을 주시해 보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반짝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몸체 전부를 매개로 나름의 표정과 태도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나무는 종려나무 특유의 잎과 줄기를 기이하게 뒤틀면서 마치 곡예 하는 듯 생기를 발산한다. 또 다른 나무는 한껏 펼쳐진 잎이 바람으로 흔들리는데 나무는 그 바람을 즐기는 듯 차분하다. 또 어떤 나무는 성장한 여인처럼 자신의 화려함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그저 당당하다. 물론 이런 형상을 감지하는 것은 일정정도 상상과 투사의 결과다. 실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형상을 상상해 낼 수 있게 하는 형태의 배열이나 기운 같은 것이다. 종려나무 자체의 이국성 혹은 이질감 또한 이런 상상력을 보강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이국성을 포함한 모든 주변성에 대비되어 혹은 그것을 관통하여 드러나는 개체의 특이성이다. 별자리와 관련하여 흔히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다. 별들은 그저 하늘에 떠있다. 하지만 어떤 시선이 주어지고 별들 각각의 어떤 특징들이 주목되면 그들은 돌연 형태를 갖추고 상상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별들은 더욱 빛난다.

8.
종려나무 이외 다른 나무를 다룬 사진의 한 유형에서는 대체로 들판이나 공터의 작은 수풀 옆에 홀로 있는 나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나무들 대부분은 몸체가 클로즈업되어 있어. 서있는 장소가 명확치는 않다. 이들은 거의 이종, 변종 혹은 기형의 나무들이다. 작가가 나무를 클로즈업한 것은 아마도 이런 특징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어떤 나무는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성장했고, 그렇게 서있다. 어떤 나무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위로 오를수록 머리가 커져있는 모습이다. 어떤 나무는 SF영화의 괴이한 ET 모습을 상기시키며, 어떤 나무는 그 속에 무슨 괴물이라도 들어앉아 있는 양 음산하고, 속이 언뜻언뜻 검다. 이들 나무는 모두 정상적이지 않다. 장애가 있거나 괴이하거나 혹은 누추하며, 혹은 공포스럽다. 일괄하여 역시 주변적이다. 이들 역시 반짝인다. 하지만 이 경우는 주변성 자체, 곧 이종, 변종, 기형 그 자체가 빛난다. 주변성 속에서 주변성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대비되어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빛난다. <Untitled_daepo1170, 2014>는 나무인지 나무와 넝쿨과 풀숲이 뭉쳐진 덩어리인지 사진으로는 명확치 않다. 이 작업에서 나는 추레한 행색으로 웅크리고 앉은 조용한 성품의 한 노숙인을 만난다. 그 추레함이 반짝인다.

9.
김옥선이 이들 나무에서 표정이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곧 주변적인 것들 속에서 어떤 반짝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조금은 다른 시선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른 시선이란 중심 지향의 시선이 아닌 주변을 돌아보는 시선, 대상을 장악하려 하기보다 대상에로 열린 시선을 말한다. 이런 열린 시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 점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그저 자신이 못났다거나 세상은 알 수 없다거나하는 정도를 넘어서 어떤 궁극적인 한계를 절감하고 바깥 혹은 외부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개인과 사회의 삶은 중심지향적인 사고와 행위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이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가끔 시야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아니면 지속적으로 축적된 자각을 통해서든 이 중심지향적인 사고방식과 질서를 흔들 수 있으면 우리의 시선은 조금씩 변화한다. 주변이 중요해 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주변은 공간적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주변은 실상 중심-주변 구도가 작동하는 모든 곳[예를 들면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제 주변은 중심-주변 구도 속의 주변이라는 의미를 탈각한다. 주변은 중심의 힘이 약화되는 곳, 중심의 시야가 한정되는 곳, 곧 일종의 경계 지역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 주변에서는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것이 보인다. 이 새로운 것은 바로 우리의 인식의 한계 너머로부터 온 것, 바깥-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주변의 의미가 바깥-외부와 만나는 장소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이 바로 타자의 흔적이다. 타자는 원칙적으로 가시적이지 않고, 내가 포착하고 동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흔적, 기미들일 뿐이다. 타자는 이 같은 흔적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가 새롭게 열린 시선으로 만나는 반짝임은 바로 이 흔적이요 기미다. 김옥선이 이번 사진에서 기록하려는 것은 바로 이 흔적과의 만남이다.

10.
숲속 나무사진에서는 이 외부-타자의 흔적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여기서 나무와 또 다른 나무들, 혹은 넝쿨, 풀숲이 얽혀 만들어내는 형태는 앞서 와는 달리 의인화된 형상을 상기시키기보다는 아닌 어떤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일종의 영적 기운 같은 것을 감지하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어떤 경우 그것은 나뭇가지들의 엇갈림을 타고 오른 넝쿨뭉치들의 특이한 형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다른 경우에는 몸통이 넝쿨 식물로 뒤덮인 나무가 마치 살아있는 기형동물처럼 다가오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 어떤 경우는 몸통을 관통하는 괴이한 줄기들을 가진 변종 나무가 숲 안으로 뿜어내는 기운으로 감지된다. 또 다른 경우는 가녀린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형태가 어떤 떨림을 발신하는 것으로부터 감지된다. 영기서린 이 숲 속 공간 역시 아무도 찾지 않거나 모두가 그냥 지나쳐 버리는 황폐한 장소다. 하지만 이번 경우 타자의 흔적이 깃드는 것은 덤불, 넝쿨, 가느다란 가지, 풀숲, 변형 나무들 같이 거의 모두가 미약하고, 미미하고, 미천하며, 왜소한 사물들이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주변으로 밀려난 그 어떤 미천한 존재라도 빛날 수 있다는 것....

11.
타자란 인식과 사고의 한계 너머의 것이다. 하지만 타자는 그저 저 바깥에 배제된 채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깨뜨리며 다가온다. 때문에 이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할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존재와 정체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에게 자신의 해체를 감수하는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중심 지향적 사고에 사로잡힌 시선만은 아니다. 타자에 의해 침범 당한 시선 혹은 타자에 의해 압도된 시선 역시 만연해 있다. 동시대 혐오미술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시선들이 그것이다. 아마도 중심 지향 사고와 질서가 만들어낸 삶의 실상에 대한 철저한 좌절이 역으로 이 같은 타자의 범람을 초래한 것이리라. 따라서 타자를 배척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에 의해 압도되지도 않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과 시선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해 진다. 주변이 지니는 긍정적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이 이곳이다. 요점은 나의 주변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주변을 나의 장소로 인정하고, 이 세상과 나 자신의 실은 낯설기 그지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변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타자를 포용하고 환대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타자는 이곳에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서 출몰하지 않을 수 있다. 김옥선은 이방인이라는 문화적 타자와의 오랜 씨름 끝에 이제 외부-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또 다른 장場으로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지금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그녀의 새로운 탐색이 풍요로운 결실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 영 욱(미술평론, 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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