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된 사람, 나무가 된 사진
이영준
나는 나무를 좋아해서 오대산에 가면 백년은 돼 보이는 전나무를 껴안고 한참을 어루만진다. 나무를 껴안고 너무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좀 민망스럽다. 지난 겨울 오대산에서 안아본 자작나무는 전혀 차갑지 않아서 놀라웠다. 밤의 산속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자작나무는 따뜻했다. 나무에서 온기가 나오는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해서 나무가 차갑지 않은지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나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돌이나 철 같은 비정한 것들과 나무를 같은 반열에 놓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무의 온기에 놀랐던 것 같다. 생명을 품고 있고 알게 모르게 수분과 영양분의 신진대사를 하고 있는 나무가 돌이나 철처럼 차가울 리가 없다. 한겨울이라서 신진대사가 아주 낮은 정도로만 이루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나무를 제대로 알고 있나?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무의 이미지에 대해 껍질 뿐인 선입견만 잔뜩 쌓아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그때 뒤통수를 치듯이 김옥선의 나무초상이 다가왔다. 김옥선은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나무의 존재론을 세우고 있다. 나무초상 속의 나무는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채 산소를 마구 뿜어낼 듯한 모습이 아니라 항상 희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주눅 들어 있고, 다른 존재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는 형상이다.



나무 이미지

구글 검색어에 나무나 tree라고 치면 항상 가운데 굵은 줄기가 있고 거기서 잔가지가 펼쳐져 있는 나무의 형상들이 나온다. 그게 우리가 믿고 있는 나무의 구조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가운데 굵은 둥치에서 점차로 가는 가지가 뻗어 나오고 거기 무수히 잎이 달린 형상은 전형적으로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구조이다. 그것은 철저히 위계적인 구조이다. 가운데 줄기는 중요하고 잔가지로 갈수록 덜 중요하기 때문에 지엽적(枝葉的)이라는 말은 쓸데 없는 디테일 정도의 뜻으로 쓰인다. 나무의 형상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중심-주변을 철저히 구별하는 구조를 통해 이 세상의 사회와 인간조직의 상징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건 학교건 군대건 다 이런 식으로 위에 굵은 자리가 있고 아래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잔챙이들의 자리로 나뉜 위계구조로 돼 있다. 영어에서 계통도를 000 tree, 예를 들어 family tree라고 부르고 이를 수형도(樹型圖) 즉 나무의 형상을 한 그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무의 형상이 가진 위계성 때문이다. 나무를 통해 위계성을 표상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위계를 당연시 내지는 자연화 한다. 그것이 자연물인 나무를 통해 표상돼 있기 때문에 그 위계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김옥선의 나무들은 그런 위계적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들은 줄기와 잔가지 사이에 위계가 없이 뒤섞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나무의 형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눈에는 그것들은 나무로 보이지 않고 잡동사니로 보인다. 우리가 어떤 형상을 보고 무엇이라고 그 정체를 파악할 때는 형상 속에서 그 어떤 것의 핵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을 쉬운 말로 하면 00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가 사람 얼굴을 잘 그리려면 얼굴의 윤곽이 아니라 얼굴 다움을 구현해내야 한다. 그런데 김옥선의 나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다움이 없다. 그것은 나무를 통해 나무를 부정하는 게임이다.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나무가 맞느냐고 묻는 게임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과 인지와 상식의 네트웍은 교란 당한다. 어쩌면 김옥선의 사진은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기존의 패턴 인식의 관습에서 벗어나 다르게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눈이 나무를 지각하는 방법과 카메라가 지각하는 방법은 다른데, 김옥선은 카메라의 지각을 따르고 있다. 사람의 지각을 따른다면 이명호가 하듯이 나무 뒤에 흰 천을 대서 배경의 혼잡스러운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특정 나무의 모습만 나타나게 해야 할 텐데 김옥선이 하는 방식은 나무와 배경이 마구 뒤섞인 모습으로 찍는 것이다. 사람이 숲속의 나무를 볼 때는 머리 속에는 이상적인 나무의 상이 이미 내장돼 있다. 예를 들어 40미터 이상을 쭉 뻗은 채 곧게 자라는 전나무의 고고한 모습이 내장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숲속에는 전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경에는 온갖 나무들이 있어서 전나무가 들어가 있는 시각장을 교란한다. 사람의 눈은 다분히 선택적이라서 그 교란된 노이즈들은 제거해 버리고 자기가 보고 싶은 전나무만 본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눈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눈이 받아들인 데이터를 처리하는 뇌가 선택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뇌는 거꾸로 눈에게 피드백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은 잘못 보기도 한다. 반면 카메라는 전나무와 다른 나무들을 구별하지 못한 채 온갖 줄기들의 잡동사니들을 다 찍어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쭉쭉 뻗은 전나무의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나무가 숲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속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얽힌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김옥선의 나무들이 사회 속 인간의 뒤얽힌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나무에 대한 선입견을 카메라가 수정해준 것이다. 사람 눈으로 본 것보다 카메라가 본 것을 더 믿는 이유는 인간의 지각에 개입해 있는 선입견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 신화

우리는 나무를 일종의 구세주 같이 생각하여 산에 나무가 많으면 좋고 마당에 좋은 나무가 심어져 있으면 좋은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옥선이 보여주는 나무들은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 중심계급과 주변계급이 있듯이 나무들 사이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있고 계급이 있다. 김옥선이 사진 찍은 나무들은 주변의 모습들이다. 다들 초라하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잘못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김옥선이 선입견 없는 카메라의 눈으로 나무를 보고 있다는 점 외에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실제 삶에서도 항상 늠름한 것이 아니듯, 나무라고 해서 항상 늠름하게 산소만 내뿜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옥선은 그런 나무들이 제주의 모습이라고 말 한다. 분명히 내가 제주도에 갔을 때 본 나무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나는 항상 관광객으로만 가서 그런지, 제주도의 나무들은 하나 같이 예쁘고 맑아 보였다. 나와 김옥선의 차이는 가끔씩 제주도에 가는 사람과 제주도에 항상 사는 사람 사이의 시각의 차이다. 그래서 나무들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김옥선이 꼭 나무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를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나무에 대해 좀 알아보고자 한다면 나무에 대해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참고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지와 실제가 확연히 구별돼 있던 옛날에는 ‘그림의 떡’은 실제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넘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나, 이미지와 실제가 정동(affection)을 통해 마구 넘나들며 기운을 주고 받아서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되는 요즘 시대에는 사진을 잘 보려면 그 피사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대상의 에너지를 간직한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무그림을 보면서 나무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영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강판권이 지은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글항아리)을 권하고 싶다. 1115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들에 얽힌 역사와 문화 얘기가 가득하다. 나무를 자연 속의 한 생물체에 한정 짓지 않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로 다루는 책이다. 사실 공부를 좀 깊이 해보면 굳이 누가 어떤 생물종의 역사와 문화를 해설해 주지 않아도 과학적인 얘기 자체가 풍부한 담론을 이루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요즘 과학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 중 그런 담론을 펼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지은 <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가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만약 철학자의 입장에서 식물에 대해 쓴 책을 보고 싶다면 장 마르크 드루앵이 쓴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알마)을 권하고 싶다. 이런 책들이 어렵고 부담스럽다면 검색창에 ‘우리나무’라고 치면 많은 책들을 찾을 수 있다. ‘우리’라는 말이 민족주의적인 냄새를 피우지 않나 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 한반도 안에 있는 나무들 먼저 알아보고 차차 눈을 넓혀 지구상의 다른 곳에 있는 나무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나무에 대해 생각할 때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나무를 너무 영웅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가 산소를 만들어준다, 정서적 치유효과가 있다, 땔감으로 쓴다 등등의 이유 때문에 고마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나무를 베거나 숲에 불을 내는 사람을 만고역적 취급한다. 그런 사람들이 나무도 암에 걸리고 나무들끼리 치사하게 경쟁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애국가에도 나오는 기개 높은 소나무는 독성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에 소나무가 자라는 곳의 땅에는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 협죽도란 나무는 잎과 줄기 모든 부분에 청산가리의 6천배나 되는 지독한 독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 나무가 무작정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종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적절한 밀도를 이루고 있어야 좋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책이나 그림 등 표상 속의 나무는 항상 균형 잡혀 있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개별자들은 다 유한하고 파편적이고 어딘가에 치우쳐 있는 존재인데 어찌하여 나무는 그렇게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받게 됐을까? 그것은 나무를 신화화해온 오랜 역사 때문일 것이다. 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 삶 속에서 신화화 돼 있었던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이 치성 드리는 마을 앞의 성황당 나무에서부터 그리스 신화의 판, 로마 신화의 실바누스 등 동서고금에 나무를 신화화한 형상은 많았다. 높이가 100미터 넘게 자란다는 요세미티의 메타 세쿼이아에서부터, 설악산 정상에 살며 100년 동안 키가 10센티미터 밖에 자라지 않는다는 홍월귤나무에 이르기까지, 나무의 신화성은 수직으로 솟아 있다는 성질에서 비롯된다. 메타 세쿼이아는 키가 커서 신화적이고 홍월귤나무는 키가 작아서 신화적이다. 그들은 신화성의 필수조건으로 내재해 있는 과잉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적당한 것은 신화가 될 수 없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힘이 세거나 너무 가혹한 운명에 처해 있다. 결국 신화란 우리들 담론의 과잉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신화는 의미과잉의 영역인 것이다. 우리가 나무에서 바라는 이미지도 실제의 나무, 기능의 나무가 아니라 과잉의 나무다. 한 없이 하늘을 향해 있으면서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것이 우리가 나무에게 바라는 신화성이다. 즉 나무에 대한 신화는 존재의 무한성을 향해 있다. 오대산이나 설악산의 깊은 숲속에 가보면 한참 자라다가 제 무게를 못 이겨서 우지끈 부러져서 장열하게 쓰러진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우리는 영원히 살며 항상 산소만 내뿜어 인류를 구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지상에 있는 많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 하는 것 같다.



나무 사진

이 세상에 제일 밥맛 없는 사진가가 유명인사들 멋지게 사진 찍어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사람에 대한 신화를 이미지를 통해 한껏 부풀려 준다. 그러면서 그 신화 덕에 사진가 자신도 신화화된다. 배우 000을 멋지게 찍은 사진가 000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들이 만드는 이미지는 거짓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사진에서는 유명인사의 멋짐, 개성만이 아니라 소탈함, 꾸미지 않음, 맨얼굴 같은 것도 신화화 된다. 즉 유명인사의 모든 면을 남김 없이 신화화 해 버린다. 신화화 된다는 것은 대상에 본래 있지 않은 과도한 가치가 부여된다는 뜻이다. 즉 사진가에 의해 유명인사들은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격상된다. 대중들 사이에 소비되는 이미지들은 스타의 얼굴사진에서부터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에 대한 것까지, 대개 이런 식으로 신화화 돼 있다. 이런 이미지의 신화성에 대해서는 롤랑 바르트가 <현대의 신화>에서 충분히 썼으므로 더 이상 얘기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레슬링에서부터 가루비누, 스트립쇼, 와인과 우유 등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온갖 사물들의 신화성에 대해 쓴 바르트도 나무의 신화성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는 것만 말해두자. 나무가 주위에 너무 많아서였을까. 유명인사에 대해 거짓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옳지 않듯이 나무에 대해서도 거짓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아니, 재미 없는 일이다.

김옥선의 나무초상은 나무에 대해 반대 각도에서 접근한다. 나무초상은 전혀 나무를 신화화하고 있지 않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 떡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타난 사람의 모습처럼, 나무들은 전혀 꾸밈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단지 나무를 어떻게 묘사하느냐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사진의 프레임은 가운데 있는 것을 항상 주인공으로 삼는 기능을 하고, 무엇이든 그 한가운데 두면 영웅적인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진 찍기의 방식이다. 주민등록증 사진에서부터 만 레이의 초현실적인 사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진은 그런 프레임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사진 찍는 사람은 프레임을 그렇게 다루면서 사진의 주인공, 즉 주체가 된다. 이제 21세기가 되어 뭔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라면 뭘 잘 찍어볼까 하는 고민 대신 어떻게 하면 그런 사진의 기본질서 바깥으로 나가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김옥선의 사진이 바로 그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사진에서 나무들은 프레임 한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주인공은 아니다. 사실 그녀의 사진에 나오는 나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들의 몇 가지 존재상태와 동떨어져 있다. 나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일단 나무는 숲의 주인공이다. 나무는 숲속에서 자기 집에 있는 집주인처럼 당당하다. 숲의 풍요로움이란 결국 나무의 풍요로움이다. 나무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되고 추워도 더워도 어두워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는 완전히 자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풍요롭다.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존재인 나무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숲은 풍요의 전당이다. 필자는 컨테이너선을 타고 항해할 때 말레이시아의 포트 켈랑 항구에 정박했을 때 높직한 컨테이너선에서 멀리 말레이시아의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정글의 바다를 보면서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근원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글숲의 풍요로움이었다. 이름을 가진 숲도 많다. 오대산 전나무 숲길, 담양 메타 세쿼이야 숲길, 불로뉴숲 등 이름을 사진 숲들은 자연에다 역사와 문화적인 풍요로움 까지 더한다.

숲을 벗어나 우리 생활에 한결 가까운 나무들도 많다. 도시의 가로수나 가정에서 키우는 관상수들이 그것이다. 이들 나무들은 숲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관상수로 쓰이지만 나무는 숲에 있는 동안만 풍요로운 것이고 숲을 벗어나면 더 이상 풍요롭지 않고 초라해질 뿐이다. 정원에 심는 관상수 중 제일 불쌍한 것이 주목과 자작나무이다. 태백산에 가보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의 자태가 놀랍기만 하다. 오랜 세월을 켜켜이 쌓인 생명력은 경이롭기만 하고 그 신령함은 철저한 유물론자인 나 같은 사람도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그러나 정원의 주목은 흡사 들판의 야수가 포획되고 쇠사슬에 묶여 왜소하고 초라해진 듯한 모습으로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다. 자작나무도 마찬가지다. 오대산의 고지대 능선에서 눈처럼 흰 가지를 빛내던 자작나무는 도시의 매연 속에서 시커멓게 죽어가며 관상수로 굴욕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주목이나 자작나무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도시공간이나 정원의 인위적 주인공은 될지언정 자기 생명의 주인은 아니다. 풍요로운 숲에서 강제로 납치돼 도시로 온 나무들은 인공적인 관리를 받으며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가 노예로서, 나중에는 ‘흑인’인 미국시민으로 변형되어 살 듯이 나무들도 도시 속에서 인공적인 존재로 제2의 삶을 산다.

나무의 이 두 가지 존재양상은 어쨌든 나무를 싫건 좋건 주인공으로 삼는다. 반면, 김옥선의 사진 속 나무들은 전혀 주인공이 아닌 잉여 존재들이다. 중심에서 벗어나 의미의 영역으로 편입돼지 못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 사진 속의 나무들은 대부분 깊은 숲 보다는 생활주변에 있는 것들이다. 인간과 자연 중간에 어중간하게 끼어서 살다 보니 나무다움을 잃고 형태가 망가진 것들이다. 아니, 나무다움의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가 됐다. 자연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면 동물이건 식물이건 주변화 되버리는데 나무라고 예외가 아니다. 가축은 존엄한 생명을 잃고 먹을 거리로 전락하고 식물은 관상용으로 전락해 버린다. 즉 그 자체로 존재의 의의를 잃어버리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용도의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김옥선의 사진은 그렇게 버려진 존재인 나무에 주목한다. 전혀 신화적이지 않은 기계인 카메라가 나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한다.



나무 사람

이 세상에는 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존재양상이 나무 같아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으며 겉은 나무둥치 같이 거칠지만 속에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있는 사람이 그들이다. 김옥선이 사진 찍은 사람들에게서 나무사람의 냄새가 난다. 그들은 헝클어진 나뭇가지처럼 정돈돼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 카메라로 주목한 사람은 김옥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왜냐면 유명해서 매스컴에 나올 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나대는 성격이라 남들에게 자신을 내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표정이 나무를 닮았다. 그들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나와 있다. 김옥선의 사진에서는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인 상태가 구현돼 있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의 ‘사람 되기’, 사람의 ‘나무 되기’의 차원이다. 질 들르즈의 <천개의 고원>에서는 되기(becoming)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들르즈는 이 세상 존재가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언가가 되고 있는 유동의 상태로 파악한다. 즉 어떤 것은 항상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것이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은 항상 자기 자신 되기의 신공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되기란 꼭 진화적으로 조금씩 변해서 어떤 것으로 되어간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늑대를 사냥하려면 늑대가 되야 하는데, 그런 꼴과 본성의 변화도 되기의 중요한 부분이다. 들르즈의 철학의 강점은 이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점이다. 그 되기 속에서 존재는 그 반대의 것이 되기도 한다. 학생이 졸업해서 선생이 되는 것, 경찰관이 범죄자가 되는 것, 포식자가 피식자가 되는 것은 들르즈의 철학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나무가 되는 것도 영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자연은 인간세계와 맞닿아 있으면서 조금씩 인간화 되고, (여기서 인간화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화된다는 것은 인간을 닮는다거나 인간 답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이 옮는 것을 말 한다. 즉 사람의 때를 타서 손상 되는 것, 사람에게 파되되는 것도 다 인간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화된다 (이 말에 대해서도 오해하지 말자. 자연화가 꼭 좋은 뜻이 아니라 인위적 질서가 무너지고 요소들이 해체 되는 것, 기생충이 뱃속에 들어오는 것, 상처가 나서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옥선이 찍은 사람들은 독특한 존재가 돼버렸는데, 김옥선의 사진의 마술적인 작용 속에서 인간의 테두리가 용해돼 버리고 반쯤은 나무가 돼버렸다. 김옥선의 나무들이 자연도 아니고 인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듯이, 이들도 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 사실 탐라국에서는 육지에서 온 한국인들도 어정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러므로, 나무를 찍다가 사람을 찍다 보니 어느새 사람도 나무가 됐고, 결국은 사진도 나무가 돼버린 이 사정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얼마나 나무가 되야 할까?



이영준 <나무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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