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확장
박평종
지난 10여 년간 김옥선이 발표해 온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Woman in a Room》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의식의 변화를, 《Happy Together》에서는 문화적 차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커플들의 모습을, 《Hamel????s Boat》에서는 타지에서 꾸려 나가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들의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문제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들은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일종의 메타포적인 자화상에 가깝다. 그래서 그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위상을 타인의 모습을 통해 차분히 관찰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위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동류들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들에게서 작가가 발견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타인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유사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가 관찰한 타인들, 요컨대 자신과 유사한 타인들의 모습이 작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단지 나와 다른 타인, 존재론적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완전한 타자가 아니라 나와 유사한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습만 다를 뿐 비슷한 위상, 비슷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타인이라 할 수 없는 타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몸은 달라도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특별한 타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그들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시켜 보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그들과 엄격한 거리를 둔 채 그들의 모습이 진정 자신의 모습과 유사한가를 꼼꼼히 살핀다. 비슷한 조건 속에서 살더라도 개인의 특수성은 삶의 미세한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리며 차이를 만들어 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업은 작가를 떠난다.


당당한 여성

《Woman in a Room》 연작에서 작가는 여성의 의식 변화에 주목한다. 카메라 앞에서 나체 상태의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는 여성들은 그 자체로 변화를 암시한다. 옛날 같으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녀들은 당당하고 솔직하며 거리낌이 없다. 때로 의복이란 몸의 가면이라고 주장하듯이, 때로는 옷이 몸치장을 위한 장신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듯이 그녀들은 카메라, 곧 타인의 시선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선선히 드러낸다.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의 몸에 자부심을 가진 당찬 나르시스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성의 벌거벗은 몸은 실존적 위상과 사회적 위상을 함께 갖는다. 사회적 위상을 염두에 두자면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기란 어렵다. 그때의 나체는 수치스런 몸이다. 한편 실존적 위상을 고려할 때 벌거벗은 몸이 문제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벌거벗은 몸이란 그냥 몸 자체이다. 요컨대 실존적인 의미에서의 몸은 몸 이외에 어떠한 다른 것도 덧붙이지 않은 벌거벗은 몸을 가리킨다. 나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통렬한 고백이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적 위상이 사회적 위상과 별개로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항상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몸의 실존적 위상이 사회적 위상의 지배를 받는 셈이다. 그래서 몸은 항상 스스로를 감춰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몸은 실존적 위상밖에 알지 못하는 순진한 몸이다. 사회적 위상을 고려하지 않는 벌거벗은 몸, 그것은 곧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는 무지한 몸이다.
그러나 김옥선의 사진에 나타난 벌거벗은 몸은 사회적 위상을 모르는 생각 없는 몸이 아니라 몸의 사회적 위상에 당당히 도전하는 기백 있는 몸이다. 벌거벗은 몸의 사회적 위상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의 시선이 없다면 벌거벗은 몸은 실존적 위상만을 갖는다. 따라서 사회적 위상에 맞서고자 하는 몸은 타인의 시선과 싸워야 한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몸은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는 나약한 몸이다. 작가는 몸의 실존적 위상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적 위상의 부당함에 항의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몸의 물질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몸을 타인의 시선에 내맡기는 것이 도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하여 사진 속의 여성들은 몸이 자신의 역사이자 떳떳한 주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듯하다. 그들 중에는 우유 빛처럼 뽀얀 살결을 내보이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도 있고, 소매 없는 겉옷만을 걸쳐 입고 한쪽 가슴을 살짝 드러낸 관능적인 포즈의 여인도 있다. 축 늘어진 가슴이나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 무릎 언저리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흉터는 부끄러워할 무엇이 아니다. 그 또한 몸의 일부, 요컨대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Woman in a Room》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몸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점차 몸과 공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주거 공간에서 주인으로서의 몸을 당당히 드러낸다. 《Woman in a Room》 연작이 가져다주는 당혹감과 놀라움은 벌거벗은 낯선 몸이 시야에 익숙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데서 온다. 그 몸은 찬미의 대상도 아니며, 관능적 시야에 사로잡힌 욕망의 대상도 아니다. 몸은 객체가 아니라 어엿한 주체로 마치 타인의 시선을 되받아치듯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거기에서 주체와 객체의 전도가 생긴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여성들의 시선과 태도로 인해 오히려 그녀들을 바라보는 관객은 당혹감에 빠진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 당당히 드러내는 모습은 우리 시대 여성의 자기 인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객체에서 벗어나 그 시선에 떳떳하게 맞서는 강인한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여성의 실존적 위상이 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존적 위상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한 것은 사회적 위상이다. 그것을 낳은 것은 명철한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이 사회적 위상의 변화를 낳고 그것은 다시 실존적 위상에 대한 재인식을 부른다.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보면 벌거벗은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 윤리의 위반과 맞닿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적 금기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Woman in a Room》 연작이 가져다주는 놀람과 당혹감은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서 온다. 하지만 위반이란 항상 금기에 대한 명료한 의식 속에서만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금기에 대한 인식 없이는 위반도 없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행위는 당당한 자기 인식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그녀들의 의식 속에서 금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록 사회적 통념이 그것을 금기로 여긴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 행위를 성 윤리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나 뻔뻔스러운 추문으로 규정할지라도 그렇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여성들은 그것을 금기라고 여기지 않기에, 혹은 금기라는 단어조차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기에 행위는 위반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금기의 위반이라 할 수 없는 그녀들의 행위는 단지 수동적인 자기 인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거대한 사회적 통념과 대결하는 적극성을 지닌다.
이처럼 여성의 자기 인식이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은 그것이 특정한 개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데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부자리 깔린 안방에 태연자약한 자세로 서 있는 중년 여인들은 일자 허리나 삼 단으로 접힌 뱃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선선히 드러낸다. 출산하여 거죽이 흉측하게 갈라진 아랫배와 젖먹이에게 뜯어 먹혀 홀쭉해진 젖가슴을 유유히 내보인 주부(eungung in a room)도 모던한 침실 한복판에서 타인의 시선과 당당히 맞서고 있다. 자신의 몸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키워 낸 자랑스러운 표식인 것이다. 세간이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단출한 부엌 중앙에 태연자약하게 서 있는 주부(Eunshim in a Kitchen)나, 침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가구도 없는 썰렁한 방 안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젊은 여성(Yien in a Room), 젖가슴과 허벅지의 흉터에 개의치 않고 발랄한 표정으로 나신을 드러낸 젊은 여성(Jungeun in a Livingroom) 또한 타인의 시선 앞에서 위축됨이 없다. 나아가 또 다른 여인은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취하는 포즈를 따라 하면서(Fu in a Livingroom) 자신의 몸을 이상화된 여성의 그것에 견주기까지 한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혹은 카메라가 상징하는 익명의 무수한 타인 앞에서 떳떳한 이 여성들의 당당함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모든 주체에게 그러한 당당함은 놀랍기도 하고 때로는 부럽기도 한 덕목이다.


타인과 함께 살기

《Woman in a Room》에서 당당한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에 대해 반추해 보았던 작가는 이제 《Happy Together》에 이르러 국제 커플에 관심을 돌려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롭게 숙고할 기회를 갖는다. 한국 여성과 서양 남성 커플, 나아가 동양 여성과 서양 남성 커플에 주목하여 거대한 문화적 차이를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구성해 보여 주는 것이다. 그 관점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소통의 부재 상태에서 살아간다. 카메라를 응시한 여성과 딴청을 피우는 남성의 시선은 어디에서도 만나지 않는다. 여성이 사진 속의 주인공으로 중요한 행위를 하고 있지만 남성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해찰하는 남자, 그는 가정을 꾸려 함께 살아가는 여자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작가가 구성해 낸 사진 속의 풍경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는지, 요컨대 행복감을 느끼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작가는 그 점을 사진에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문제가 언어에 걸려 있지만은 않다. 이는 남성의 모국어에 능통한 여성 커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하는 커플 사이에 언어가 장벽으로 작용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같은 모국어를 구사하는 커플의 경우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소통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차이에서 생겨난다. 그것을 문화적 차이라 부를 수 있겠다.
문화적 차이는 커플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우리의 근대가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해 온 까닭에, 또한 서양식 근대화가 국제주의라는 이름 하에 동양권에도 널리 퍼져 나간 까닭에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현상은 도처에서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수세기 이상 내려온 고유한 전통은 각 문화권에 여전히 뿌리 깊게 잠복해 있어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차이는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삶의 미세한 영역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밥과 김치를 먹어야 한 끼 식사를 했다고 여기는 사람과 스테이크와 삶은 야채를 먹어야 제대로 된 식사라고 생각하는 사람 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일정 기간 동안이야 문제될 것 없지만 그것이 기약 없이 계속되어야 할 때 미래는 답답한 것이 된다. 바닥이 따뜻해야 겨울이 안온한 사람과 실내 공기가 훈훈해야 편한 사람이 함께 살자면 어떡해야 하는가. 매운 음식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과 매운 음식만을 찾는 사람,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사람과 냄새조차 맡기 싫어하는 사람이 매번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겠는가. 바닥에 쪼그려 앉지 못하는 사람과 맨바닥에 앉는 것이 편한 사람이 방에서 함께 TV를 보려면 따로 앉아야 하는가. 한편 가족 공동체의 결속을 중요시 여겨 집안의 대소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이 미덕이라 믿는 사람과 개인의 사생활이 우선인 사람이 부딪힐 일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서로 간의 사고 차이를 극복하기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그 생각을 존중하면 되고 정녕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일깨워 고쳐 주면 된다. 그것이 존중과 관용의 자세이다. 그래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견해로 인정하고 참아 내면 그만이다. 그것이 포용과 인내의 태도이다. 하지만 관습과 취향, 요컨대 몸에 밴 생활을 바꾸기는 무척 어렵다. 생각의 명령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몸이 그렇게 하는 탓이다. 그래서 문화 차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차이를 서로 인정한 채 존중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나 그것은 관념의 편에서 주장하는 당위이지 일상의 현실에서는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권 속에서 성장한 개인들 간에도 그러한 문제가 상존하는 터에 전혀 이질적인 문화를 살아 온 이들 사이의 차이란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실상 개인들의 차이는 때로 문화적 차이보다 더 큰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때 문화적 차이는 사소한 것이 된다.
서양의 사유는 차이가 본질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차이에서 탄생하며 차이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차이가 없다면 개인 또한 없다. 하지만 진정 차이가 근원인지, 혹은 그러한 생각이 개인을 본위로 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그 또한 서양 문화의 특수성이 아닌지는 질문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차이를 좁혀 나가는 것이 공동체의 삶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좁히더라도 개인들의 차이는 남는다. 결국 문화적 차이와 개인의 차이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차이는 결국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큰 차이와 작은 차이를 따지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게 작가는 오히려 차이를 과장하여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여인의 시선을 카메라의 눈과 교차시킴으로써 《Woman in a Room》에 등장하는 당당한 여성의 태도를 부여하고 있다. 그 시선에는 아직도 여전히 국제 커플을 이질적으로 여기며 차이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 섞여 있는 듯하다. 이러한 추정은 불확실한 것이지만 작가는 차이를 불편해 하는 한국 사회 일반의 인식에 이의라도 제기하듯 커플의 시선을 차단함으로써 차이를 강조하려 애쓴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커플이 아니라 마치 남남처럼 어색하게 한 집에 사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관점이 작가의 시각인지, 사진에 등장하는 여인의 시각인지, 혹은 또 다른 제3자의 시각인지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카메라의 시선과 여인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는데다가 카메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눈을 파는 남자의 시선이 사진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남자는 여자에게 그냥 타인과도 같다. 그것은 남자의 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자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에서 보자면 여자 또한 한눈을 팔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남남처럼 산다. 어쩌면 그것이 개인의 차이를 선선히 인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존중하는 커플들의 정상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어긋난 시선을 통해 차이가 강조되었을 때 낯설음은 커진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여인의 바로 곁에 턱을 괴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남자의 모습(Sung and Jeff)은 얼마나 어색한가. 한편 배를 감싸 안은 만삭의 아내 곁에 무뚝뚝하게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는 남편(Anna and Paul)이나, 아내가 시선을 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듯 등을 돌린 채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는 또 다른 남편의 모습(Eunju and Mattheus)은 차이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무관심으로 보인다. 남남처럼 사는 커플은 안락의자에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도 마치 부부 싸움이라도 한 듯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Oksun and Ralf)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때로 이 어색한 커플들 중에는 연인의 포옹에 목석처럼 반응조차 하지 않는 경우(Eunjung and Garry)도 있는 것이다.
작가가 구성해 낸 이러한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차이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두 타인의 삶을 결정하는 근원적인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문화 차이가 됐던 개인 차이가 됐던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두 사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사람들이 함께하는 삶의 가장 진솔한 태도가 그것이지 않느냐고 말이다.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삶은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항상 삐걱거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차이는 이겨 내야 할 것이 아니라 선선히 받아들여야 할 무엇이 된다.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선선히 수긍하며 사는 이들도 있는데 조그마한 개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존중과 관용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가는 타인과 함께 사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꿈꾸는 이방異邦

《Happy Together》에서 차이를 지닌 채 살아가는 커플의 모습에 주목했던 작가는 이제 《Hamel????s Boat》 연작을 통해 이방에서의 삶, 요컨대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으로 관심을 옮긴다.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모습에 천착하면서 작가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며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던 하멜에 그들을 비유한다. 배는 그 염원을 실현시켜 줄 구원의 상징이다.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이름 높은 제주도는 잠시 동안의 여행이나 여가를 보내는 이들에게나 아름다운 땅이지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낯선 타지일 뿐이다. 제 아무리 자연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자연만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결국 제 땅의 문화는 결핍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것은 지식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고양을 가져올 테지만 그것은 생활과는 다르다.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 제 땅의 문화대로 살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은 고역스러울 수밖에 없다. 삶이라는 것이 근근이 버텨 내야만 하는 것이 될 때 인간은 도주를 꿈꾼다. 강제로 조선 땅에 억류되어 있다가 결국 탈출에 성공하는 하멜처럼 말이다. 이방에서의 삶이 진정 도주를 염원할 만큼 잔인한지는 살아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국의 문화 자체에 대한 염증 때문인지, 자기에게 익숙한 고국 문화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결핍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대개 이방에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이방에서의 삶은 서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제주도의 이방인들에게서 본 것은 이국땅에 대한 애착과 그 땅에서의 삶에 적응해 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국의 문화를 배워 향유할 줄 안다. 국술을 배우는 안나(anna the martial artist)나 검도를 익히는 브라이언(brian the fighter)이 그렇다. 이동식 포장마차에서 유유자적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meiko and seth with coffee) 마을 할머니들 틈에 스스럼없이 끼어들 만큼 토착민들과의 거리도 좁혀 가며 사는 이방인이라 할 수 없는 이방인이 그들(peter the nomad)이다. 한편 그들이 이국땅에서 향유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문화란 비록 존중의 자세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즐겁게 누리기에는 왠지 어색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자연은 타지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더구나 자연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무엇보다도 근원적이지 않던가 말이다. 얕은 해안에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쾌감(the snorkelers)은 어떤 인공의 놀이기구가 가져다줄 수 있는 재미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초록의 숲 속에서 나신으로 산책하는 즐거움은(natasha the painter) 자연을 멀리하면서 문명인들이 망각해 온 자연의 신비를 일깨워 준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연을 새롭게 체험해 나간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독서하는 재미나(dawn the dreamer), 숲 속에서 피부로 산소를 호흡하며 풍욕을 즐기는 기회(rich the raw foodist)는 어디서나 흔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라 버린 갈대숲에 우아한 자태로 앉아 몽상에 빠지거나(sarah the morning star), 한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deebra in the wind) 바다를 즐길 줄도 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이들끼리는 한데 모여 모래사장에 둘러앉아 휴식을 취하거나(the english teachers), 가끔은 단체로 가까운 섬에 놀러가 또 다른 자연을 맛보기도(hanna in Udo) 한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타고난 노마드인인지라 항상 가 보지 않은 다른 장소를 꿈꾼다. 배낭을 맨 채 이국땅의 구석구석을 염탐하듯 돌아다니거나(ross the wanderer), 나신으로 자연의 바람을 즐기면서도 지평선 저 너머를 동경하는(rich the naturalist) 것이다. 숲 속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오솔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케빈의 모습은(kevin the humanist)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 하는 노마드인의 차분한 상징이다.
타지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 이방인들에게 고국 땅이란 그저 물리적인 태생지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미지의 땅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제주도는 낯선 이방이 아니라 또 다른 고국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이방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이 될 수도 없다. 이를 국경 없는 세계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김옥선의 작업이 보여 주고 있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살아가는 모험심에 찬 인간이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여성들, 힘들지만 차이를 수락함으로써 타인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커플들, 익숙하여 편안한 땅에 안주하지 않고 이방을 꿈꾸며 체험의 폭을 넓혀 나가는 노마드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주어진 현실을 살기보다는 불투명하더라도 가능성의 삶을 사는 미래형 인간이다. 그러한 삶은 일상의 편의나 세속적인 안락, 평온과 같은 현실적인 가치와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 본 삶을 사는 것은 편한 길이다. 그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 보지 않은 삶,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 본 삶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러한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살 때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인간은 그대로라면 아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능성을 사는 인간은 인간을 확장시킨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확장된 인간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글쓴이 박평종은 미학을 전공한 사진 비평가로 작가와의 상호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사진에 관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사진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 활동을 하는 한편 이미지에 대한 기초 이론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Writer Park Pyong-Jong is a photography critic with an aesthetics major. His writing is an attempt to view photography as mutual communication between objects and artists. Consistently maintaining his concern with history of photography, he tries to pursue the fundamental theories of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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