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경계를 뛰어넘는 이유
장정민
김옥선은 오랫동안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여기서 타자란 보편적인 다수와는 다른 삶의 태도나 방식을 지닌 이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인 남편인 랄프를 만난 이후에 그의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방인이라는 공통의 소재를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국제결혼이 발생시킨 부부사이의 긴장된 거리감을 재현한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와,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으로 제주라는 타지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을 기록한 <함일의 배 Hamel's Boat>는 몇 년에 걸친 긴 호흡을 통해 완성된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제주라는 공간에 정주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삶의 태도를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여줬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함일의 배>연작들과 함께 전시된 <노 디렉션 홈No Direction Home>은 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이방인들과 그들의 생활공간을 함께 보여주었으며, <그린+하우스 Green +House>는 지난 몇 년간 작가의 남편이 제작하고 있는 배의 제작과정 및 그와 연관된 자료들을 함께 제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다른 방향으로 변주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나 제주라는 낯선 땅에 정주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나온 이들의 희망과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배는 이러한 이들의 희망이 구체적인 사물로 재현된 것으로써 이들이 제주로 타고 온 것이자 언젠가 제주를 떠나 새로운 공간을 향해 떠날 이동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과연 모든 이방인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사진 속 이방인들과 달리 <함일의 배>모티브가 된 하멜(Hendrik Hamel)처럼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도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단어들의 차이를 그들의 이동 동기에 따라 나누어 설명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발적으로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반면, 정치적 경제적 이유 등으로 인해 추방당하거나 유랑해야 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또한 경계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감옥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도 언급했다. 즉 누군가는 경계를 벗어나고자 스스로 이방인이 되는 반면, 누군가는 그 경계가 필요해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옥선의 배 또한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배에 올라 경계를 넘고자 하겠지만,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경계를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삶의 방식은 세계화(globalization) 현상과 맞닿아 있다. 아준 아파듀라이 (Arjun Appadurai)는 이미 이러한 현상을 야기하는 동기들을 민족, 미디어, 기술, 자본, 이면의 이동이라는 다섯 가지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또한 이들 다섯 가지 차원들은 상호교차하면서 세계화의 복잡한 양상들을 발생시키면서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 행위의 직접적인 동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사진 속 이방인들은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의 수많은 동인 중 일부만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대부분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영어권에서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 자신이 밝혔듯 이들은 제주를 꿈의 계기를 마련하는 공간으로 여기며, 이곳에서 번 돈이 바로 자신들의 미래를 가능케 해주리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도시에서의 더 높은 벌이를 포기하고 제주라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택할 수 있을 만큼의 선택권도 가지고 있는 타자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우리는 기본적인 선택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들도 존재한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예컨대 동남아시아나 제 3세계로부터 유입된 이방인들의 이동 동기는 대개 이들과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이유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물론 이들에게도 이동은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을 생존에 대한 희망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사진 속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계화가 발생시킨 이방인들의 유형은 김옥선의 사진 속 이물들 외에도 무척 다양하다. 물론 그의 작업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만큼 모든 유형의 이방인들을 작품 속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경험으로부터 발생된 문제의식은 사진 매체 고유의 기록성과 만나면서 현실과 담론 사이의 간극을 훌륭하게 좁혀 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개인의 경험 없이 개념적으로만 표출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들은 더욱 의미를 지닌다. '노 디렉션 홈'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현대는 가리킬 집이 없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노마드의 시대이며, 우리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 글_장정민(미술평론가)_월간 아티클 2011 12월호 BACK TO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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