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의 사진이 던지는 질문 "당신 배는 어디로 탈출합니까"
임근준
제주도를 배경으로 외국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면, 결과는 어떨까. 일단 두 가지 전형적 사진을 떠올리기 쉽다. 하나는 관광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면을 보여주는 르포르타주 사진이다. 하지만, 제6회 다음작가상 수상자인 사진가 김옥선(b.1967)은 그 두 전형에서 벗어난 장면을 성공적으로 포착해 제시한다. 지난 19일 금호미술관에서 공개한 <함일의 배> 연작이 바로 그것.

관광 산업에 의해 이국적 이미지를 뒤집어 쓴 제주. 그리고 제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어떤 이유에서든 한국의 이국적 섬에 도착한 이방인들. 이 진부하기 쉬운 두 요소를 진부하지 않은 형식으로 기록한, 김옥선의 이야기는 헨드릭 하멜에서 시작한다. (작가가 선택한 이름 `함일`은, 하멜의 호패에 한자로 적힌 음차식 이름 표기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의 하멜기념관에 가면, 범선이 엉뚱하게 땅위에 올라앉았는데, 그 풍경은 가히 초현실적이라, 여러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켜왔다. 김옥선은년 서귀포 앞바다에 표류한 뒤 조선에 억류되고, 13년 만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헨드릭 하멜에 감정을 이입했다. 그런데 때마침, 금년은 작가가 제주에 정착한 지 13년째 되는 해.

그간 작가는 자신이 겪은한국사회와의 불화를 작품에 반영해왔다. 보통의 한국인 여성들을 모델로 섭외, 그들의 방을 배경으로 누드를 촬영한 <방안의 여자(Woman in a Roon)>(1996-2001) 연작은, 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데뷔작으로, 여성 육체에 대한 고정 관념을 정면 돌파하는 힘을 보여줬다.

그리고 뒤이어 발표한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 연작(2002-2005)은, 소위국제결혼그러니까 외국인과 결혼해 국내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여성들의 초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차이들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가정 공간을 배경으로 여자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배우자를 보조 인물로 제시하는 초상 사진은, 감정을 배제한 인물들의 심드렁한 순간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과 자신의백인 남편을 촬영한 사진에서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부부들의 사진에서건, 일정 수준 이상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편견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쉽사리 통합되지 않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남녀 간의 권력 차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후 <해피 투게더> 연작은 한국인의 범주를 넘어서 국적이 다른 연인들--게이와 레즈비언을 포함하는--의 관계로 시선의 폭을 넓히더니 한층 서늘해진 톤으로 일단락됐다. 촬영 형식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억누른 분노의 농도는 눈에 띄게 낮아져버렸다. 역시 이런 종류의 사진 작업엔 자기 치유의 효능이 있는 법일까

<함일의 배> 연작에서 작가는 울화를 가라앉힌 모습이다. 이제 그는 타인의 구체적인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작가 노트엔 이렇게 적었다. 제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만나 하멜이 그토록 떠나고자 했던 한국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듣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때 지긋지긋하게 여긴 곳이 이방인들에겐 탈출구로 여겨진다는 점이 흥미로웠던 것일까 아니면 결국 그들은 표류자이고 어떤 심리적 이유에서 억류되고 있다는 말인가

익스팻이라 불리는 이방인들의 감정 표출을 배제한 얼굴과, 가을부터 봄 사이 구름으로 뒤덮인 제주도의 야릇한 날씨는 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경계선상의 삶을 사는 이들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우울함이나 단호함이, 예의 관광지의 매력적 모습이 아닌 낯선 풍광과 병치될 때, 묘하게도 (근년에 더욱 희귀해져버린) 리얼리티가 도드라진다. (이 경우, 사진이 표출하는 리얼리티가 온전히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피사체가 된 이방인들의 정체성은 제각각이다. 제주에서 국외자 특유의 현실도피적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고, 잠시 공연차 섬에 들른 사람들도 있다원어민 영어 선생님들 특유의 어중이떠중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들이 있는가하면, 규칙적 노동으로 단련된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방랑자 그레첸>, <빨간 스커트를 입은 플라>, <꿈꾸는 사람 던>, <철인 크리스>, <영어 선생님들>, <수영하는 사람 조셉>, <자연주의자 리치> 따위의 무미건조한 제목은 모호하게 피사체들의 꿈이나, 취미나, 혹은 사진 찍히는 상황 자체를 언술할 뿐이지만, 섬세하게 촬영된 연출 사진은 피사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가가 피사체의 개인적 이야기와 욕망에 초점을 맞춰 귀를 기울인 결과, 도리어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한층 강조됐다. 내면의 분노가 작업의 원동력이었던 시절엔,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촬영할수록 (작가의 의도와 달리) 모델과 촬영자가 동일시됐더랬다. 참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옥선의 <함일의 배> 연작은 우리에게 나지막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배는 어디로 탈출합니까





추신) 하멜기념관에 있는 범선으로 시작하는 도록은, 건조중인 작은 요트로 끝난다. 작가의 남편이 세계일주를 꿈꾸며 손수 만들기 시작한 배다. 일상의 탈출을 기도하는 꿈의 배가, 실제로 파도를 가르며 제주를 떠나는 그날이 올까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꿈꾸는 일만큼은 소중해 뵌다.

작가는 전화 인터뷰 말미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계획을 세우고 공부하며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모습이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하죠. 역시 중년의 작가는 세상에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다.

추신 2) 사실 나는 하멜보다는 하멜 일행 가운데 유일하게 네덜란드로의 귀환을 거부한 얀 클레센에 더 관심이 간다. 나카사키의 상관장(商館長)인 데니얼 식스의 로비에 의해, 미처 탈출하지 못한 잔류 선원 여덞 명이 조선을 떠나 일본을 향할 때, 클레센은 홀로 조선에 남기를 선택했다.


임근준의 용감한 그들 당돌한 예술: KBS1 Radio, 정용실의 문화포커스, 2008.06.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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