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관상
김계원
전시장 벽면은 나무 사진들로 가득차 있다. 야자수도 있고 감귤 나무도 있다. 기울어진 나무, 죽어가는 나무, 바위 위의 나무, 나무인지 풀인지 알 수 없는 나무, 군을 이루고 있는 나무, 주택 한가운데의 나무, 이층집 모양의 나무, 등굽은 나무, 헐벗은 나무, 이끼로 덮인 나무, 잘뻗은 등줄기를 가진 나무, 잔가지가 무성한 나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무, 붕대감은 나무, 곧 쓰러질 것 같은 나무, 말라버린 나무, 만져보고 싶은 나무, 속삭이는 나무,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나무, 슬퍼보이는 나무. 이상한 말이지만, 작가 김옥선은 나무의 얼굴들을 정성스레 촬영했다. 4X5인치 대형 카메라의 렌즈는 디테일을 극대화시켰고, 균일한 중조톤은 표정과 태도를 절제감 있게 표현하였다. 옅고 깊은 컬러감은 이국적 분위기를 가중시키기도 했다. 대상중심의 프레이밍, 완결된 구도, C-print의 사진적 질감, 김옥선의 나무 사진은 포트레이트의 시각적 형식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물론 포트레이트의 문법을 모르거나 시각적 리터리시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저 나무를 찍은 사진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제주로 이주한 후 지난 6년간, 김옥선은 로컬의 인물과 풍경을 기록해왔다. <Hamel’s Boat>시리즈에서는 제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소망-이미지를 재현하여, 하멜 표류기라는 역사적 사건과 시적인 병렬을 시도하였다. <No Direction Home>시리즈에서는 외국인들의 임시 거처인 원룸 내부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지리적 이질성과 사물/인물간의 충돌을 포트레이트의 형식으로 담았다. 국제 결혼 커플과 게이 커플을 촬영한 초기작 <Happy Together>에서도 인물은 작업의 서사를 풀어가는 중심에 있었다. 그 곳에는 인물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이 있었다. 카메라와 대상, 인물과 공간 사이에서 유발되는 긴장감이었으며, 인물간의 문화적, 인종적, 성적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기도 했다. 작가는 이러한 긴장감이 가장 미묘한 형태로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프레임 안밖에서 개입하였다. 이 시리즈들이 연출과 기록, 무대와 일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가 사진적 장치들을 긴장감의 일부로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적 긴장감을 공간-인물-카메라의 긴장적 관계 위에 능숙하게 포개어 놓는 것. 작업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쩐지 <Hamel’s Boat>나 <The Shining Things>에서는 긴장감의 강도가 조금 늦추어 진 듯 하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 여유가 생기고, 카메라를 쥐는 손목의 힘이 느슨해졌다. 그러다보니 문화적 이질성과 차이의 문제는 시적으로, 은유적으로, 그리고 다면적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키워드에는 변함이 없다. 김옥선의 작업은 (이종, 이주, 차이)를 키워드로 삼는 괄호 1과 (문화, 역사, 지리)의 괄호 2 사이에 “사진술”이라는 연산기호를 넣어서 추출한 대답들의 연속체였다. 그러나 제주의 풍광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이 연산의 외연은 “자연”이라는 괄호로 한번 더 묶여졌다. 여기서 자연이 대괄호가 되어 수식의 해답을 결정하는 초월적 요소가 될지, 아니면 연산기호의 일부로 기능할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이야말로 작가가 3년간 제주를 누비며 찍어온 <The Shining Things> 작업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작가는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A컷을 확실히 알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사진들에는 A컷 B컷을 고르기가 힘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이 없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유형에 대한 정답이 없는 것, 그것은 대자연의 신비로 이해될 수도 있고 평론가 이영욱이 지적한 바와 같이 타자성(alterity)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기록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삐져나오고, 찍혀지고, 드러나게 되는 우연적 요소들은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이 저 나름의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야자수가 감귤나무 곁에 사이좋게 서 있는 저 풍경의 역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종과 토종이 어우러진 풍경이 “제주의 풍광”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기 시작되었나. 어떤 이유로 유사 야자수 종들은 제주에 뿌리내리기 시작했을까. 전형적인 제주도 돌담집과 나란히 서있는 하와이풍 활엽수, 이 뜬금없지만 또 자연스러운 풍경을 이주와 정착, 이종과 변용, 문화와 지리, 그리고 번역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개념화시킬 수 있는가. 이런 서사를 뒤로하더라도, 형태와 질감의 도상학만으로 우리는 대체 저 종려수가 왜 저렇게 애절하게 기울어져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그 나름의 사연에 우리는 사진술로 화답할 수 있을까?

근대 서구의 유형학, 혹은 도감적 방법론이 개별화(individualization)의 시선을 탑재한 기술이라면, 김옥선의 나무 작업은 이를 참조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The Shining Things>가 흥미로운 것은 식물도감이나 유형학적 사진과는 별개로, 혹은 그 너머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작가의 시선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분명 나무의 얼굴과 디테일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동시에 이러한 개별화의 불가능성, 혹은 그것의 임계점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임계점 마저도 역사적, 문화적 코드와 뒤엉켜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이를 나무의 관상에 대한 기록으로 볼 수 있을까. 관상술은 자연과 문화의 문턱에 걸터앉아 의미를 소환해내는 작업이다. 관상학이 의미를 만드는 방식의 포인트는 문화가 자연의 어법을 빌려, 그 코드속으로 자신을 삽입시킴으로써 의미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에 있다. 운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감지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상일 뿐, 나무는 어떠하고, 바위는 또 어떠할까. 나무와 바위의 관상을 읽기 위해 우리는 자연과 문화의 문턱을 이동시켜야 하는걸까. 그렇다면 어디로? 그것도 사진술로? 김옥선의 작업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에 묻고 답하기 시작하였다.


김계원(조지아주립대 교수)
BACK TO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