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유형학 - 김옥선의 사진에 관하여
구나연(미술비평가)
1.
사진은 재현이 아니기에, 피사체와 현실 사이의 관계가 우선 의미를 생산한다. 이는 사진의 프레임 안에 있는 현실과 보는 이의 현실이라는 이중의 상태와 연계한다. 특히 피사체가 프레임 속의 시간과 강력이 밀착할수록 사진에 대한 접근 방식은 관습적인 것이 된다. 리얼리티의 범주 안에서 피사체는 과거라는 시제를 고수하며 외형을 증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피사체가 사진 속의 시제에 무심한 대신 보는 이의 현실 속으로 불쑥 던져질 때, 즉 탈 시제의 이미지로 하나의 언표가 될 때, 그것은 과거와 결별하고 지금에 관한 어떤 의미화에 다가간다. 이때 사진은 멈춤의 조건으로 운동하며, 어떤 사실로서 우리의 현실에 대한 환유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유를 해석하는 데에서 사진의 의미가 생성된다. “작가의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의미화 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의 지적처럼, 사진이 지시하는 현실은 얼마든지 우리의 현실로 치환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요컨대 김옥선의 사진이 지닌 형식적 장치들은 타자의 환유로서, 경계의 유형학을 살핀다. 그것은 타자를 구별 짓는 습관적 관념의 접경 위에서, 보는 이를 그 안으로 유혹하고 급기야 보편의 구조에 질문을 던진다. 이는 그의 사진을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이끌면서, 피사체의 인덱스가 우리의 방향으로 되돌아 오는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순환적이며, 역동적인 구조는 김옥선의 사진의 중심 인물이 공간과 맺는 관계, 그 관계가 또한 작가로, 다시 관객을 거치는 낯선 심동의 지형을 만든다. 2. 김옥선의 초기 작업인 <Happy Together(2002~05)>에는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 공간 속에 있지만 인종이 다르며,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함의는 제법 뚜렷이 드러나는데, 이들의 얼굴, 몸짓, 공간이 서로 조금씩 미끄러지며 만들어내는 극적 상태 때문이다. 더욱이 렌즈를 직시한 여성의 시선은 사진 속의 다른 인물들과 괴리되어 있으며, 이것이 그 사진을 연출된 구도인지 혹은 현실의 상황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사진 바깥을 응시하는 그들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장소의 부재와 소외의 구조를 이끈다. 특히 프레임 밖을 직시하는 여성의 시선은 회화사에서 우리의 현실을 그림 안의 세계와 혼재시키던 전통적 응시의 방식을 연상시키는데, 관객은 이 시선을 통해 사진 속의 공간으로 이끌리고, 그들의 낯선 시간과 장소 속으로 안내된다. 그러나 피사체와 관객 사이에 일어나는 이같은 교차는 피사체의 일상에 축적된 이방인의 감정으로 관객을 초대하면서도, 정작 디딜 곳이 마땅찮은 사진 속 공간에서 결코 환영 받지 못한 어정쩡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상태는 기실 누가 타자인가? 라는 정답 없는 반문으로 나아간다. 결국 사진 속 현실과 그것을 보는 이 사이의 괴리가 사진 안에서 일어나는 괴리로, 또 현실의 괴리로 확장되는 것이다. 김옥선의 사진은 이미지로 삶을 드러낸 피사체를 그저 냉담히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며, 이미지를 통한 어떤 반추에 이르게 만든다. 그것은 사진 속 현실, 그들과 마주했던 작가의 시선, 그리고 그 안으로 발을 딛은 관객 사이에 그어진 관계의 다각형을 만들고, 타자 인식의 객체화를 통해 보편적 삶에 관한 의문으로 점차 그 무게의 중심을 옮긴다. 따라서 우리는 보는 자이자 동시에 보이는 자라는 실존적 타자의 논리와, 사진 속의 인물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시선의 소양감이 충돌하는 경계에서 김옥선의 사진이 지닌 의미와 대면한다. 그의 사진이 특별한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관습적인 차이의 인식을 일깨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을 곧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사체의 다소 상투적인 제스처와 구도로 나타난다.예컨대 <함일의 배(07~08)>에서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에 외국인이 서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 속의 인물들이 그곳을 낯설게 인지하고, 그곳에 있는 자신을 기념하려 할 때, 우리의 통념은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행자가 아니며, 항해자 혹은 표류자이다. 김옥선의 사진은 그러한 피사체가 장소와 맞닿은 상태와 그 밀도를 담아냄으로써, 차이와 보편이라는 삶의 형태 위에 놓인 줄타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no direction home(08~10)>에서 공간은 제주도의 자연 풍경에서 다시 어느 실내로 옮겨진다. 피사체가 삶을 영위하는 작은 장소는 종종 ‘한국적’ 기호들을 노출하고 있다. 그것이 없다면 그들이 있는 지리적 지점이 유추 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민속적 공간 보다는 일상화된 공간 속에서 유사한 삶의 형태를 갖는다. 김옥선의 작업이 장소의 기호를 노출하는 방식은 피사체가 그 곳(혹은 나라)에 살면서 쌓아갈 수밖에 없는 사물과 일상의 융해를 통해서이다. 구석에 놓인 하르방이나 벽에 걸린 작은 노리개, 포인트 꽃 벽지, 가구의 문양, 심지어 방석에서도 한국의 일상 속에 내재된 삶의 형식이 화면 중심의 이방인들 옆에서 기이한 이물감을 지닌 채 놓여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사진의 프레임으로 절단된 그들의 공간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최소한의 세계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 속 인물은 프레임의 중심에서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그 곳이 자신의 장소이며, 자신이 만든 장소이자, 거기서 자신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알 수는 없으나, 우리 앞에 명확히 보이는 것은 이 세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이의 공간과 그 안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한 삶의 형태이다.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방황하는 사람은 없다. 피사체가 그들의 거주지 속에 앉아 있는 침대나 소파, 의자와 같은 사물은 인물 사진의 관행과 연계하기 보다, 이방인이라 일컫는 관성을 지나 도달하게 되는 삶의 보편성과 안식과 관련된다. 김옥선의 사진이 다름으로 시작되어 같음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피사체의 외양과 더불어 존재하는 공간이 그들의 장소, 곧 세계를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결국 모두의 삶과 교차되기 때문이다. 3. 김옥선의 작업 방식 중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유사한 상황의 피사체를 찾고 그들의 이미지를 동일한 촬영 방식을 통해 열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반복은 기록이나 증명 혹은 분류에 기인한 배열과 무관하다. 그의 작업은 통념의 경계에 놓인 대상들을 대면하고 촬영하면서, 그들의 존재를 집단의 형태로 점차 뚜렷이 함과 동시에 각각의 개별적 차이를 선명히 포착하는 형식적 결과를 낳는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피사체들은 독립적인 사진의 틀 안에 기거하며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공통의 의미를 낳는 집합의 부분이 되고, 또한 경계에 놓인 존재론적 유형의 하나가 된다. 특히 <The Shining Things (2011~14)>에는 다양한 나무의 사진이 등장한다. 한반도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아열대 지역 나무인 야자수와 종려나무 등을 포함한 나무의 사진은 제주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관계된다. 김옥선의 나무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필연적 조건 속에서 나타난 이국적 수종의 이질감, 그리고 나무라는 개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와 삶의 유사성에서 오는 동질감이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결코 움직일 수 없으며, 종류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종려나무는 종려나무가 되어야 하고, 야자수는 야자수로 자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무쌍한 반복의 생을 잇고, 군락을 이루기도 하며, 거대한 가지를 펼치거나, 높이 솟아 올랐다가 누렇게 사그라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각각의 존재에는 생과 관련된 순환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명의 나무들이 살고 있는 다양한 형태가 김옥선의 유형학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룬다. 사진가가 나무를 선택함과 동시에 사진가는 나무의 시선을 빌어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에 자신을 투사한다"고 했다. 김옥선의 나무 사진들은 그의 다른 사진에 비해 작가의 내면을 특별히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말하자면, 탈 공간의 지리학이자, 탈 시제의 인류학이다. 사진이란 매개체가 부동하는 나무를 찍음으로써 그들 존재의 지리학을 옮기고 분류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또한 타자의 문화라는 인류학을 자율적 개인과 보편적 삶의 영역으로 옮길 수도 있다. 김옥선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무와 정반대로 마땅히 정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장소에서 호흡하는 인물들은 시제의 현존을 증거함이 아닌,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상황과 선택을 공간의 관계 속에서 발화하며 어떤 실존을 수렴해 들어간다. 이는 그의 최근 전시 <베를린 초상>에서도 계속된다. 이제 그의 사진은 ‘여기에 온 사람’, '거기에 있는 것'을 거쳐 '그곳에 간 사람'으로 나아간다. 이번 전시에는 스물 다섯 명의 인물 사진이 정렬되어 있다. 이들은 1959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로 파견/이주한 간호사들 중 베를린에 정착한 인물들이다. 상호 국가 간의 필요로 인해 간호 인력으로 파견되어 홀로 삶의 새로운 국면과 마주하기로 결심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파독 간호사들은 정부의 외화 벌이 수단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낯선 타국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일과 삶을 일구었던 여성들이다. 김옥선은 그렇게 독일의 1세대 이민자가 된 여성들의 현재를 전통적인 인물 사진 방식으로 담아내지만 사진만 보아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제목은 BNP로 시작되는 일련 번호가 있을 뿐이어서, 설명을 따로 읽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여인들과 그저 마주서야만 한다. 인물 사진 하나 하나에 접근하면 개별적 소사를 지닌 피사체가 프레임을 채우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일구어 놓은 집에서 소박한 포즈를 잡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렇게 담긴 인물 사진이 전시장에 열 지어 걸린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한 점의 사진마다 모두 다른 대답이 나올지 모른다. 인물 한사람, 한사람이 지닌 개성과 공간과 분위기가 그들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김옥선은 이렇게 그들을 열린 <베를린의 초상>으로 풀어 놓는다. 그리고 다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때, 그들은 또한 <베를린의 초상>으로 묶이게 된다. 전시장의 전체 배치는 과거 독일로 파견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린 간호사들이라는 역사의 차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계기가 독립적 삶의 변화를 이끌고, 각기 다른 변화무쌍한 경험의 시간을 쌓은 초상은 피사체가 겪었던 시간의 같음과 또 다름의 등가 위에서 나타난다. 하여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상황, 촘촘한 세부로 분할된 개별적 여정, 그리고 유사한 구도의 이미지 속에서 각기 다른 육체와 공간을 드러낸 베를린의 초상들이 오늘에 놓인다. 그러나 김옥선의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습과 공간이 구체적인 삶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에 분명히 나타난 것은 과거, 낯선 먼 곳에 정박한 이들 개개의 삶이 그려 놓은 증거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들을 ‘누구’라고 통칭하여 부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현재에서 점차 더 먼 과거로 역행해 가는 사진 속 시간의 형태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중심에서 침묵하는 인물만큼, 그들이 있는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배경 공간을 채운 사물은 그들의 삶을 설명하는 도상학적 장치처럼 놓여 있다. 예컨대 전시장에는 가장 큰 크기의 초상 사진 두 점, <BNP 8712ES>와 <BNP 8709CZ>가 걸려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보고 있으면, 언뜻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프랑스 대사들>을 연상하게 된다. 북구 르네상스의 사실적 초상화의 도상의 전통이 김옥선의 초상 사진 앞에서 떠오른 것은, 낯선 세계를 항해하고, 음악과 예술을 향유하던 과거 인문주의자의 당당함이 피사체의 모습과 그들의 공간, 그리고 사물의 언어와 교차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국과 타국, 가족에 대한 책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위안과 합주와 같은 가치가 그 모습에 개입해 왔음을, 집안에서 신발을 신은 주거 방식에 익숙해진 경계선의 인물임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김옥선의 작업은 전통적 인물 사진의 정면 초상은 물론, 미술사의 전통 초상화 형식까지도 아우르는 고전적 구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 기록 사진이 사용하던 유형학적 반복의 방식이 그 사진의 의미를 강화한다. 견고한 형식의 언어가 김옥선의 사진이 갖는 개념적 구도를 더욱 명징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형식적 어휘와 더불어, 그가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주변적 인물, 경계에 선 인물에 대한 자기 성찰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카메라로 피사체를 붙잡는 일이 또한 자신을 붙잡는 일이라는 사진가의 고백이자, 사진 속 인물을 시제로부터 해방시켜 의미의 망으로 데리고 가는 작가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관객은 그런 피사체와 작가의 시선과 동시에 맞닥뜨리며, 그 이미지의 경험을 공유하며 사진의 주법에 참여한다. _2019년 6월호 미술세계 BACK TO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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