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 없는 호기심의 시선
권혁규(독립큐레이터)
사진은 자기 배반적이다. 호기심 가득하지만 무자비하고, 순간에서 출발해 영원으로 질주한다. 또, 하나의 장면에 대상의 본질을 담길 열망하지만 본질은 결코 절대화되지 않음을, 따라서 그 열망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환영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진은 순간의 영원성을 기제로 대상에 다가서는 실패의 과정을 지속한다. 애초에 사진은 실패의 흔적으로 대상에 관한 사유를 전달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그 공들인 실패를 결정적 순간의 포착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 배반성과 불가능성 위에 축조된 사진, 그것은 종종 자신의 한계를 자백하며 대상을 마주하기도 한다.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 호기심이 해소되기 전에 그 시선을 멈추기도, 또 대상을 초월하거나 낭비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기도 한다.



1. 절대성과 우연성의 병치

김옥선의 작업은 특정 대상 그룹을 향한다. <방안의 여자 Woman in a Room>(1996-2001)는 일반 여성들의 누드를,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002-2005)는 국제결혼한 커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또 <함일의 배 Hamel`s Boat>(2008)와 <No direction Home>(2010)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을, <빛나는 것들 The Shining Things>(2014)은 역시 제주도에 퍼져있는 외래 식물, 주로 종려나무를 다룬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아뜰리에 에르메스, 2019. 5. 31 – 7. 28)을 통해 선보이는 최근작 <베를린 초상 Berlin Portraits>(2018)에는 60~70년대 독일로 이주해 약 50여 년간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재독 여성 간호사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작가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대상-인물들이다. 외국 남자와 결혼해 제주도에 사는 작가는 본인의 삶을 관통한 여성, 결혼, 이주, 경계, 이방인과 연관된 사유를 이들 대상에 비춘다. 따라서 작가가 선택한 대상은 존재론적 사유와 질문을 내포하는 표상으로, 그리고 대상을 대하는 방식은 그러한 사유와 질문의 이미지화에 관한 작가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연출자라기보다 관찰자로서 대상을 마주한다. 본인의 삶에서 삐져나온 질문들로 시작된 작업은 비슷한 삶을 사는 존재들을 동조와 이해, 또 고민과 호기심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 재촉 없는 궁금증의 시선은 카메라 앞의 대상들을 편안하고 덤덤하게 때로는 명상하듯 존재하게 한다. 대부분 작품 속 인물의 집에서 촬영된 사진은 여성의 몸, 커플의 모습, 이주인의 삶을 아무 과장 없이 마치 유형학적 이미지처럼 제시해버린다. 감정이 아니라 실존, 판단이 아닌 현실의 지시에 집중하며 특정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 말 그대로 지극히 객관적이고 지시적인 이미지로 대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사진에는 개별 대상뿐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향한 시선의 전복, 절대 극복되지 않을 것 같은 차이, 또 이방인을 향한 환상과 편견이 서늘하게 감지되지만 이러한 감각의 파열마저도 마치 대상을 휘감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직접적이고 지시적인 작가의 작업은 다소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사진의 오랜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순간을 영원에 안착시킨다. 시간의 정지와 안착의 문법, 그것은 물론 사진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에도 예를 들면 회화와 조각에도 적용 가능하다. 하지만 사진이 정지시킨 시간이 회화나 조각의 시간과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사실과 현재, 실제 대상의 동반이다. 작가는 극적 연출이 아닌 지극히 일반적이고 지시적인 이미지로 절대 멈추지 않는 시간을, 그리고 그 안에 쉬지 않고 흐르는 현실의 존재를 포착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은, 사진 속 대상과 실제 대상과의 간극을 최소화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피사체를 박제시키는 방향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명했듯, 관찰자를 자처하는 작가는 작업의 대상-인물을 미리 쓰여진 대본이나 서사에 정박된 객체가 아닌 자기 발화의 주체로 인정한다. 다시 말해, 작업의 사실적 이미지는 절대성의 단순 기록이 아니라 피사체에 내재된 가변성과 우연성을 인정하며 발현되는 것이다.



2. 확대된 파노라마 속 대상

지시성과 우연성, 관찰자와 행위자, 나와 타자 사이를 오가는 작업은 다양한 관계의 중첩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언급했듯, 작가는 작업 속 대상에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하지만 이 자기 투영은 우연성을 인정하는 촬영의 과정처럼 나와 대상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대신, 나의 사유를 수정하고 초월하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풀지 못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보기도 하고, 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오해를 공유하기도 한다. 마치 칼비노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와 똑같이 생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고 결여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투영은 관객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작가와 사진 속 인물 사이에 선 관객은 자신을 응시하는 대상과 눈을 맞추며 타자를 거울삼아 자화상을 그린 작가의 경험을 상상적으로 재연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외국인은 아니지만 마치 외국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어떤 연인을, 자신은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문화 차이를, 또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떠올리며 회고와 각성의 시간을 가질지도 모른다. 스스로 결론 내릴 수 없는 삶의 질문을 투영하며 타자를 발견하고 자아를 출현시킨 작업의 과정이 관객들의 경험과 포개지며 보다 다양한 시선과 경험을, 또 사회적 장면과 서사를 호출하는 것이다.

작가는 분명 타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작가의 근작들은 이러한 관계 설정 방식에 일종의 모드 변화를 유추하게 한다. 대상을 향한 자기 투영의 정도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미 <함일의 배>와 <No direction Home>에서 본인에 대한 집중을 느슨히 하고 타인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려는 태도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는 자기 투영이 극도로 제한적인, 혹은 그 정도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대상-나무를 촬영한 <빛나는 것들>로 연결된다. 물론 위에 설명한 작업들은 여전히 작가 본인의 삶과 상당 부분 포개지지만 <방안의 여자>나 <해피 투게더>처럼 개인적 고민과 질문이 휘몰아치진 않는다. 재독 여성 간호사들을 다룬 최근작 <베를린 초상>(2018)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감지된다. 작가가 이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독일로 이주한 이들은 작가의 과거 작업 <방안의 여자> 속 인물들처럼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는 행위 주체들이며, <해피 투게더>의 주인공들처럼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이다. 또 <함일의 배>와 <No direction Home>의 외국인들처럼 낯선 곳에 정착한 이방인들이기도 하다. 일련의 작업 속 대상-인물들을 경유해 지금 여기 앉아있는, 그동안 작가가 던져온 질문을 응축하는 그들을 작가는 어느 때보다 차분히 응시한다. 작업에서 불쑥 삐져나오던 개인적 질문이 긴 시간을 관통하며 희석된 듯 정제된 시선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공간과 이야기를 대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 관계의 변화가 사진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여전히 자신의 집에서 본인들의 일상을 공개하며 반대편에 서있는 우리를 바라본다. 이들이 대체될 수 없는 개별 주체들이라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그 응시와 관계의 태도 때문인지 대상의 독자성이 보다 넓은 사회 혹은 인간 일반에 대한 관심과 연동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작품의 제목이 이전처럼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코드로 표기되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린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의 독자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드러내온 작가의 작업이 보다 확대된 사회와 현실의 파노라마 안에서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고, 그렇게 유폐되지 않은 주변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동시대 디지털 환경의 사진이 즉각적으로 태어나고 죽으며 시간보다 더 빨리 미래로 흐를 때 김옥선은 순간을 가로지르는 지속 가능한 대상, 그와 연결된 사회를 떠올린다. 낯선 주변을 초대하며 무효화할 수 없는 현재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권혁규(독립큐레이터, 퍼블릭아트 6월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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