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풍경이 된 얼굴들
박보나
나는 사진이 어렵다. 미술관에 걸린 예술 작품 사진을 볼 때마다, 작품을 실제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기록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미적 구성과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의 숙련도로 감상해야 할지 고민한다. 현실의 사건을 박제한 사진 앞에서는 어디 까지가 실제이고, 무엇이 만들어진 가짜인지를 찾다가 자꾸 프레임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 일쑤이다. 풍경 보다 구체적 인물을 찍은 사진이 특히 더 어려운데, 피사체인 인물과 사진 작가 사이의 불편한 긴장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지시를 받고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긴 쉽지 않다. 작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멀 수록, 사진은 원래 인물을 재현하기 더 힘들어 진다. 거기에 고급 카메라의 성능에 더해, 매끈한 편집 보정까지 입혀질 경우, 사진은 피사체를 점점 더 왜곡한다. 결국 인물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전혀 다른 납작한 이미지로 전시장에 걸려 구경거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얇고 매끈한 이미지의 침묵은 늘 외롭고 공허하다.

지난 달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김옥선 작가의 사진전에 다녀왔다. 김옥선은 20년 넘게 이주와 이산의 삶을 사는 여성들과 이방인들의 사진을 찍어 온 작가다. <평평한 것들> 이라고 제목을 단 이 전시에서, 그 동안 작가가 찍은 국제 커플들의 사진과 베를린 파독 간호사의 초상, 한국에 사는 이방인들의 사진 및 제주도의 이국적인 야자수 사진 등과 함께, 한국에 시집온 외국인 여성들을 찍은 신작 <신부들, 사라> 시리즈를 볼 수 있었다. 낯선 듯 익숙한 얼굴 사이로,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잘 모르겠는 풍경이 ‘평평한’ 이미지로 나란히 ‘평평하게’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인 전시였다. 김옥선의 사진 작품은 국제 결혼을 하고 이주의 삶을 직접 경험한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으로도 읽을 수도 있고, 한국 근현대사의 줄기에서 뿌리 뽑히고 옮겨진 여성들과 새롭게 이식된 외국인 여성들, 혹은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들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기록으로도 볼 수 있겠다.

<평평한 것들> 전시에서 본 사진들 중에 정면을 응시한 여성들을 찍은 <해피투게더> 시리즈와 <신부들, 사라> 시리즈가 특히 흥미로웠다. <해피투게더>는 외국인과 국제 결혼을 한 한국인 여성과 그 남편의 모습을 그들의 집에서 찍은 것이고, <신부들, 사라>는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을 황학동의 사진관에서 프로필 사진처럼 찍은 작품이다. 두 시리즈 모두 인물을 찍은 사진으로, 내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고민하는 지점을 우회하는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띄었다. 우선, 독일인 남편과 결혼해 제주도로 이주해 살았던 작가의 사정이 사진 속 국제 결혼 여성들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과 가깝게 서 있는 인물들을 찍었기 때문에, 김옥선의 사진은 전혀 관련 없는 타인을 대상화 한다는 비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김옥선은 자신의 얼굴을 이방인 여성들과 겹쳐서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아니라 자신과 여성들의 이야기로 작업의 방향을 돌린다.

또 하나, 김옥선의 인물 사진이 연극적 연출의 순간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해피 투게더> 시리즈에서 정면을 쳐다 보는 여성들과 달리, 외국인 남편들은 여성들 뒤에서 눈을 감고 있거나 카메라와 어긋난 방향을 바라 보고 있다. <신부들, 사라>에서도 여성들은 평소에 입지 않는 전통 의상을 차려 입고 사진관에서 프로필을 촬영하는 어색한 순간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연출은 여성들의 시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전면의 주인공으로 끌어내는 방식이자, 프로필 사진을 통해 결혼과 이주를 경험한 여성들의 역사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신부들, 사라>에서 사라는 1910년 사진 교환만으로 하와이 결혼 이민을 갔던 첫 한국인 여성의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연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목표가 원본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의 매체적 숙명인 사실의 왜곡과 변형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던지는 질문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김옥선의 여성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듣기 위해 사진을 한참 들여다 봤다. 여성들의 눈빛과 주름, 손끝과 진주 목걸이, 그리고 손목에 찬 시계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나와 무엇이 다르고 어디가 비슷한 지 궁금했다. 오래 보고 있자니,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여성 뿐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는 이방인 여성들 모두에게 막연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낯선 곳에서 살면서 겪었을 그들의 외로움이, 나에게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고독으로 전해져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인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지 한 장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유대감이 생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잠깐 고민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우스운 사건이 생각났다. 다름이 아니라, 대한노인회장이 노인 차별 발언을 한 정치인 앞에서 당사자 사진의 따귀를 때렸던 일이었다. 재미 없는 농담처럼 사진 이미지를 벌하는 노인회장의 행동에서 나는 오래동안 잊고 있던 주술적 세계관을 떠올렸다. 어떤 사람을 찍은 사진을 해치면 실제로 그 사람을 해하는 것과 같다고 보는 행동은, 멀리 있는 실제 피사체와 그것을 재현(모방)한 사진이 서로 힘을 주고 받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행해지는 ‘공감주술’1) 처럼 보였다.

떨어져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 서로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항상 즐거운 상상으로 이어진다. 모든 존재가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함께 작동한다면 더 많은 것이 가능하다. 사진 속 여성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반대로 그들도 사진을 통한 나와의 간접적인 대면을 의미 있는 접촉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김옥선 작가는 사진을 매개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과 관객을 연결시킨다. 나는 낯선 여성들의 사진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타자로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동시에, 유사점을 찾으며 거리를 좁혀 나간다. 여성들도 김옥선의 사진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나와 시선을 교환한다. 나와 여성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작가까지, 모두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2023년 3월 16일에 발표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는 2,245,912명이라고 한다. 외국인과의 혼인은 17,000건으로 전년 대비 27.2%인 4천 건이 증가했는데, 이는 전체 혼인 수의 8.7%를 차지하는 비율이라고 한다. 국제 결혼에서 외국인 여성과의 혼인은 12,000건으로, 전년 대비 33.6% 증가했다. 정부의 통계는100명의 한국인 중 8-9명이 외국인과 결혼하며, 한 해에 만 명이 넘는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 여성들이 내가 서 있는 땅을 같이 밟고 살고 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많은 간호사들이 이민을 간 독일을 포함해, 한국인들의 대량 이주가 있었던 서유럽이나 북미 국가들의 공식 채널에 아시아인이나 한국인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결혼 이민을 온 외국인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김옥선의 사진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방인들의 존재의 소리를 키운다. 작은 목소리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외국에 사는 한국인 여성과 김옥선 작가, 그리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 여성과 내가 서로 희미하게 이어진다. 낯선 야자수가 이미 제주도의 풍경이 된 것처럼, 집을 떠나 온 사람들도 먼 이국의 흙에 뿌리를 내린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같은 시간을 세면서 비슷한 풍경이 되어 서로를 비춘다.


1)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설명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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