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한 것들의 도감
김계원(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사진가 김옥선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인물 사진을 찍어왔다. 제주도의 야자수를 찍을 때도 그는 인물처럼 나무를 바라본다. 인물 중에서도 작가는 유독 여성과 이주민을 많이 찍었다. 대부분의 경우 모델의 거주지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실제로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 속에 카메라를 세웠다. 그래서인지 김옥선의 사진은 “그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그에게 있어서는 얼굴이 된다”는 어빙 고프먼의 사회학적 명제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1)


인물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들은 낯선 땅에 와서 가족을 꾸리거나 추억어린 사물로 방안을 장식하고 떠나온 곳을 기념한다. 동시에 새로운 물건을 들여와 취향을 가꾸며 취미와 여가 활동을 통해 자신의 꿈을 좇는다. 하지만 이들이 발 디딘 땅은 정확히 어디일까? 국가, 지리, 영토, 주권, 민족 등의 개념에 근거한 근대적 속지주의는 이에 어떤 대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김옥선은 지난 30년간 이동과 정박 사이에서 유동하는 정체성을 사진이란 이름으로 잠시 붙들어 매는 작업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이 파인더에 담았던 대상을 ‘평평한 것들’로 부르기로 했다.

《평평한 것들》은 <Happy Together>부터 올해 착수한 신작인 <Adachi Portraits>, <Brides, Sara>까지 김옥선의 작품 궤적을 문자 그대로 넓게 펼쳐낸 전시이다. 전시에서 그의 작업은 연대기적으로 배열되거나 연작끼리 묶이지 않았다. 시간의 종축(縱軸)을 제거하자 초상, 풍경, 정물이라는 피사체의 오래된 구분법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미술관 벽면에는 서로 다른 지역과 인종, 세대의 인물 사진이 뒤섞여 동등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걸려있다. 누군가가 쓰던 물건이 사람과 야자수 사이에 틈을 만들어 오롯이 제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전시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 모든 김옥선의 피사체는 차이나 권위, 위계질서가 들어서지 않는 ‘평평한 것들’이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사진이 ‘평평한’ 매체이다. 2차원의 평면 이미지와 같은 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사진의 평평함이란 드라마틱한 연출이나 과도한 서사를 지양하고, 덤덤하게 다가가 대상의 표면을 이미지에 충실히 기입하는 작가 고유의 방법론을 뜻할 것이다. 실제로 김옥선은 재독 한인 여성을 촬영한 <Berlin Portraits>에 대해 “극적인 사건과 활동도 없는 진술”이지만, 대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장면”이며, 거기서 진실이 있다면 “다만 밋밋하고 평범”한 것으로 주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2)


그러나 ‘밋밋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진술과 달리, 사진 속 인물이 발 디딘 장소에는 격변의 근현대사가 남긴 상흔이 부조되어 있다. 20세기 글로벌리즘은 전지구인의 화합과 평화 뒤에 식민의 잔흔과 냉전의 질서, 무분별한 경제 개발과 고도성장, 노동 이주와 착취 등 어두운 폭압의 그림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터전을 빼앗기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얼굴로 새로운 삶을 구상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한 문화(인종, 젠더)가 다른 문화(인종, 젠더)와 접목할 때, 정체성은 마블링처럼 뒤엉켜 얼굴과 공간에 새겨진다. 초창기 작품인 <Happy Together>가 이동과 월경, 혼성이 정말로 행복한지를 모델과 자신에게 되묻는 작업이라면, <No Direction Home>과 <Hamel’s Boat>는 행복 추구처럼 거창한 단어를 좆지 않았다. 대신 작가는 외국인이자 제주 ‘도민’의 일상에 스며든 잔잔한 유머, 꿈, 엉뚱한 상상을 사진에 담았다. 형식적으로는 이전 작업과 유사한 유형학적 접근을 유지했지만, 제주 연작에서 시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까닭은 작가 역시 ‘도민’ 라이프에 깊이 가담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간간히 보이는 스냅 샷 식의 연출에서는 유형을 정의하던 카메라의 육중함을 조금은 내려놓은 시선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 느긋해진 시선과 여유, 피사체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로부터 일종의 능동적 중립성이 출현한다. 드라마틱한 해석이나 표현 의지를 소거하려는 작가의 능동적 개입이 중립적 자세를 견인한다는 기묘한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실 능동적 중립성이란 유형학(Typology)에서 뉴 토포그래픽스(New Topographics)를 관통하는 사진적 방법론이며, 국내외 여러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김옥선이 찍는 제주가 새로운 까닭은 그의 사진이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제주의 모습을 담아왔기 때문이다. <The Shining Things>에서 작가는 어디선가 날아와 뿌리내린 도내 곳곳의 이종 수목을 주목했고, <The Museum of Innocence>에서는 도내 다문화 가정과 난민의 주거지, 그들의 사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메라는 인간종과 식물종을 횡단하면서, 혼종성의 발자취를 보다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결과로서의 사진은 제주라는 땅이 본질적으로 순종도 혼종도 없는 그저 ‘평평한 것들’로 이루어진 장소임을 보여준다. 거기엔 이주민과 야자수뿐만 아니라, ‘뭍’에서 흘러 들어와 도민으로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고유한 시선과 관점이 결상(結像)되어 있다.

이 모든 평평한 것들은 더없이 빛나고 순수한 김옥선의 피사체이다. 마치 돌하루방처럼 대문 앞에 심어진 야자수가 나름의 멋으로 반짝이고, 몇 개의 인종이 결합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계보의 외국인 도민들이 한국인 소녀를 입양해서 한 가족을 이룬다. 카메라는 이들의 빛나는 표면과 순수한 가족애를 정직하게 길어 올린다. 제주도산 흑돼지를 먹고 제주만의 오션 뷰를 감상하며 서귀포산 한라봉을 사가기 바쁜 우리 관광객은 섬을 이루는 빛나고 순수한 존재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하다. 관광이란 본디 ‘제주산’과 같은 지역 특화된 상품을 좇고, 거기에만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김옥선의 카메라는 정반대의 장소로 파인더를 돌린다. 그의 작업은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인구 변화와 노동 구조, 섬의 용도 변경에 대해 어떤 실증 데이터보다 정확한 정보를 사진의 문법으로 제공한다. 그 안에서 제주는 국적, 인종, 장소성과 같은 근대적 규율이 심문에 붙여지는 평평한 것들의 터전으로 그려진다.

최근에 김옥선은 주제를 확장해서 제주가 아닌 다른 장소를 찍기 시작했다. <Berlin Portraits>에서는 ‘산업역군’으로 독일로 이주한 전직 한인 여성 간호사를 카메라에 담았다. 작가는 베를린 현지 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이산의 역사와 개인의 삶 사이의 상관성을 사진으로 탐색하고 싶었다고 말한바 있다.3) 그가 짊어진 대형 카메라는 1세대 이주 여성의 거주지 속으로 성큼 들어가, 지난 반세기 독일의 '손님 노동자'로서 삶을 개척해 왔던 이들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정직하게 길어 올린다.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쟁투와 연대, 사랑과 결혼, 그리고 다문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끝에서 맞이한 이들의 노년은, 카메라가 힘주어 잡아내지 않아도 충분히 조용하고 담담한 파장들로 가득한 삶 그 자체이다.

신작 <Adachi Portraits>는 일본 후쿠오카현 아다치라는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 외국인, 국제결혼 커플과 그들 자녀 세대를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Berlin Portraits>와 달리 작가는 실내 공간뿐만 아니라, 일터, 동네 등 야외에서 촬영을 시도했다. 거리, 각도, 조명, 연출법에 있어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인물이 자아내는 농밀한 감정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모델에 밀착해서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거나, 콘트라스트가 강한 자연 광원을 활용했다. 국내 결혼 이주 여성을 촬영한 <Brides, Sara>에서는 한층 더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 작가는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국내에 거주 중인 필리핀,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출신 여성을 서울의 한 오래된 사진관으로 초청했고, 사진관이 보유하고 있던 카메라와 필터, 배경 막을 그대로 사용해서 고전적인 초상 사진의 문법을 따르고자 했다. 작가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근대기 하와이 사진 신부의 스토리에서 빌려왔다. 제목의 ‘사라’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떠난 최초의 사진 신부의 이름이다. 다른 사진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사라’는 인근 도시의 사진관을 방문해서 하와이에 보낼 근사한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김옥선은 1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의 또 다른 ‘사라’들을 위해 근사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 100년 전의 ‘사라’들처럼, 사진 속 ‘사라’들은 곱게 메이크업을 하고 각자 보관해 온 민속 의상을 입거나 자신에게 유의미한 복장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이국적인 드레스와 크고 강렬한 장신구, 형형색색의 필터가 주는 화려한 색감.

카메라 앞의 여성들은 분명 ‘사라’라는 대명사로 묶여질 수 없는 개별적인 사연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Adachi Portraits>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현해탄을 건너 ‘재일’이라는 타자의 징표를 지니고 또 숨긴 채 각자 다른 모양새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옥선의 사진 속 여성들의 얼굴에는 어떤 공통된 정서가 소묘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이산이 부여했던 무게감, 주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 그리고 삶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다가올 것을 기다리는 작은 의지나 희망은 아닐까?

지난 30년간 김옥선의 사진은 역사의 배면에 가려진 일상의 장소, 인물과 사물의 시간 앞에 조용히 멈춰 서서 이들이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지 묻고 대답해 왔다. 그의 사진에서 우리가 낯섬과 이질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토록 내밀한 시선으로 평평한 것들의 존재감을 들여다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대문자 사진이 클라우드 환경을 맞아 급속히 파편화되어 가는 지금도 곧잘 대형 카메라를 들고 국경을 넘는 작가이다. 초점이 잔인하도록 선연히 맺힌 그의 사진에서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평평한 것들의 모양새와 질감, 디테일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곳에는 분명 도감의 시선 같은 것이 어려 있다. 도감은 무언가를 특권화하거나 중심을 세워내지 않는다. 대상을 명쾌히 제시하되, 은밀히 드라마를 삽입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대상을 병치하고 나열해서 빛나는 표층을 덧그릴 뿐이다.4) 김옥선의 평평한 것들 역시 그렇다. 그의 사진은 표층의 내부로 들어가 의미를 파헤치려는 우쭐한 자아를 거부하고, 대상이 대상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때 개별 인물은 전체에 흡수되고 마는 부분이 아니며, 부분이 향하는 쪽에는 어떤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도감으로 펼쳐낸 평평한 것들은 무한히 유동하는 무수한 시점으로 공존하면서, 중심의 특권을 해체하고 차이를 상대화하며 타자성의 기표를 조금씩 지워나간다.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를 그려낼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1) Erving Goffman, Stigma: Notes on the Management of Spoiled Identity, Englewood Cliffs, N. J.: Prentice-Hall, Inc, 1963, p. 88.
2) 김옥선, 「간호여성들」,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서울역사박물관, 2017, p. 130.
3) 2023년 6월 10일 오전 성곡미술관에서 진행된 작가의 도슨트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기록해 둔 메모에서 발췌.
4) 도감의 시선에 대해서는 전후 일본의 사진가 나카히라 다쿠마의 글과 사진을 참조했다. 中平卓馬, 「なぜ、植物図鑑か」(1973), 『なぜ、植物図鑑か』, 筑摩書房, 2007, pp. 9~37. 나카히라 다쿠마의 ‘식물도감’ 식 사진에 대한 해설로 김계원, 『사진 국가: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 현실문화A, 2023, pp. 329-34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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