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과 표면의 미학
박상우
김옥선은 여성, 국제결혼, 국내거주 외국인, 제주도에 서식하는 외래 식물 등 소위 국제화, 다문화 시대의 주요 소재들을 다룬다. 작가는 이처럼 다양한 소재를 사진의 전통 촬영기법인 스트레이트 방식을 통해 이 소재들에 숨겨진 다층적인 의미를 탐색한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1990년대 중반 대학원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한 작가는 20여 년 동안 10번의 개인전을 개최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대표적인 개인전이 <방 안의 여자 (Woman in a Room)>(1996, 2000),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002), <함일의 배(Hamel's Boat)>(2008), <No direction Home>(2010), <빛나는 것들 (The Shining Things)>(2014)이다. 또한 작가는 국내의 권위 있는 주요 사진상을 두루 수상한 경력 - 사진비평상(2000), 다음작가상(2007), 동강사진상(2016) - 을 갖고 있기도 하다. 국내 사진계와 미술계는 왜 이처럼 김옥선의 사진에 주목할까? 그리고 김옥선의 이 같은 다양한 사진을 관통하는 어떤 중심축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고백’의 미학이다. 소재가 다르지만 작가의 모든 사진 시리즈에 흐르는 축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두껍게 응축된 것들의 ‘드러냄’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이 작가의 심층적인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들에 대한 독백이다. 작가는 이 점을 인터뷰에서 명확히 밝힌다.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항상, 제가 제 마음속에 가장 고여 있는 것, 그런 것을 가장 생각해봐요. 내가 지금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제일 많이 하고 싶은 이야기, 현실에서 제가 직면에서 가장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 제가 생각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장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그런 것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을 좀 하고요.” 그렇다면 작가의 ‘마음속에 가장 고여 있는 것’ 혹은 작가가 ‘가장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삶과 주변화한 자신의 정체성,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국제결혼을 한 자신과 남편, 남편의 친구들, 자신과 유사한 다문화 커플, 동성애 커플, 국내 거주 외국인 등 주로 작가 주변에 머무는 소수자들의 삶과 정체성을 탐색한다. 어떤 점에서 김옥선의 사진은 1980년대 사진으로 자신과 주변인의 삶을 일기처럼 솔직하게 기록했던 낸 골딘(Nan Goldin)의 사진 시리즈인 <성적 종속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1986)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것은 낸 골딘도 김옥선과 유사하게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주변인들인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 등 소위 정상에서 배제된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그렸기 때문이다. 낸 골딘은 자신의 사진이 ‘내 인생의 일기’라는 점을 밝힌다. “나의 예술은 내 인생의 일기이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는다. 이것은 나의 가족이며 나의 이야기이다.” 낸 골딘과 마찬가지로 김옥선의 사진도 결국은 타인의 이야기 아니라 ‘나의 가족’과 ‘나의 이야기’에 관한 일기이다. “작업 처음부터 너무 많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떤 영감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나는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사진으로 풀었죠.” 김옥선 작가의 이 같은 ‘이야기’는 1996년 석사청구전인 <방 안의 여자(Woman in a Room>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주로 친구와 지인을 섭외하여 이들 여성의 누드를 그들이 살고 있는 실내 공간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작가는 이 사진 시리즈에서 기존의 미적이고 이상적인 누드가 아니라 평범하고 어쩌면 볼품없는 여성 누드를 재현했다. 김옥선의 이 여성 누드 사진 시리즈는 남성권력적인 시선을 전복하는 관점에서 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비평적 관점에 김옥선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선험적’이고 지나치게 ‘페미니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사진 시리즈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할까? 그것은 “부모와 독립된 공간, 여성이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방과 그 방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여성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처럼 ‘독립된 공간 속의 여성’을 왜 하필 누드로 표현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옷을 입고 찍은 사진과 벗고 찍은 사진 중에 후자의 사진이 훨씬 다른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그 ‘다른 느낌’이란 “인물들의 가면을 벗은 느낌, 좀 더 그 사람 자체에 다가간 느낌”을 의미한다. 결국 김옥선은 <방 안의 여자>을 통해 여성의 새로운 정체성 즉, 작가의 표현대로 “독립된 존재로서의 여성”과 “스스로 옷을 벗어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여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리고 김옥선이 표현했던 여성들의 이 같은 정체성은 당시 20대 후반 부모에게서 독립하고자 했던 작가 자신이 그 시기에 추구한 정체성 혹은 작가의 정체성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독립된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했던 작가는 이후 얼마 안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 그것은 우선 작가가 갑자기 결혼을, 그것도 국제결혼을 한 것이다. 게다가 결혼이후에 작가는 고향인 서울을 떠나 낯선 새로운 공간인 제주도에 정착을 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현실에 처한 작가가 그 상황에서 그의 표현대로 ‘제일 많이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뭘까?’ 그것은 바로 작가의 국제결혼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이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이 <해피 투게더>이다: “<해피 투게더>는 나의 결혼생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나의 결혼생활’의 어떤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그것은 국제결혼이 지닌 ‘차이(gap)’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질문한다. “국제결혼이 안고 있는 차이들은 문화적인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것인가?” 작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커플(‘옥선과 랄프’)을 포함하여 작가의 상황과 유사한 커플들, 즉 동양인 여성과 서양인 남성과 결혼한 커플을 섭외하여 사진으로 촬영했다. 작가는 이들을 촬영하면서 작가 자신처럼 일반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에 맞서,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선택을 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그들은 그 안[그들만의 결혼]에서 행복한가? Are you happy together?” 그들은 과연 ‘happy together’일까? 작가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것은 우선 사진들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무미건조하고 소통이 단절된 듯한 분위기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사진에서 남편이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은 국제결혼이 지닌 미묘한 갈등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작가는 모든 사진에서 부부가 서로 다른 방향을 보도록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국제결혼이 지닌 문화적, 개인적 차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같은 공간에 두 사람이 있지만 문화적, 개인적 배경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것을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시선과 관련해 <해피 투게더>의 모든 사진에서 특이한 점은 동양인 여성의 시선은 항상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고 외국인 남성의 시선은 다른 어딘 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시선의 배치를 통해 작가는 동양인 여성을 사진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전시장 혹은 책에서 이 사진들을 보는 관객에게 여성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는 발화의 주체자로 만든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이 모든 여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바로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연극적 혹은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연출자인 작가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배우들인 셈이다. 작가는 <해피 투게더>에서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 놓인 타인들을 통해 결국에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해피 투게더>는 저하고 남편의 일상적인 관계,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에 관심이 많아서 작업을 한 겁니다.” 김옥선은 국제결혼에서 느끼는 차이와 갈등을 <해피 투게더>를 통해 표현함과 동시에 이를 극복한다. “이전엔 랄프[작가의 남편]를 미워했었어요. 그 미움은 미국 갔다 와서 <해피 투게더>로 작업하고 그것으로 끝냈어요.” 그리고 남편 랄프와의 화해 메시지를 위한, 혹은 랄프를 위한 새로운 사진 시리즈인 <함일의 배>를 2007년 시작한다. 이 사진 작업의 시작은 작가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남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독일인인 랄프는 도대체 왜 머나먼 이곳인 제주도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사는 것일까? 작가는 이 같은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남편을 비롯해 제주도에 사는 다양한 외국인 - 방랑자, 음악가, 화가, 채식주의자, 노마드, 영어교사, 관광가이드 - 들에 대한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외국인 모델을 섭외해서 그들이 제주도에서 가고 싶어 하는 곳이나 혹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에서 촬영했다. 작가는 이 사진 작업을 통해 자신과 숙명적 관계인 남편의 ‘난해한’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작가에게 랄프는 남편이라는 한 개인에 머물지 않고 ‘정착과 이동의 경계’에 선 모든 국내 거주 외국인, 나아가 모든 이방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함일의 배>에서 ‘배’는 두 가지를 상징한다. 그것은 일상을 탈출하는 수단이자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제주도는 본국의 ‘지겨운’ 삶을 탈출하게 해주는 공간이자 동시에 돈, 여행, 이국성, 자유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No Direction Home>은 <함일의 배>의 연장선에서 제주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촬영한 사진시리즈이다. 하지만 <함일의 배>에서 작가는 야외배경에서 인물을 촬영했다면 이 사진 작업에서는 모델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의 실내공간에서 인물을 촬영했다. 작가는 여기에서도 문화의 혼성 혹은 경계에 관심을 보인다. 한국적인 실내 공간과 그 공간에 이질적인 외국인의 병치는 작가에게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해피 투게더>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각각 상징하는 실내장식이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No Direction Home>이 작가의 이전 사진들과 이 같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 유사성은 매우 사소할 뿐이다. 그것은 <No Direction Home>이 이전의 사진시리즈와 비교했을 때 작가의 사진경향에서 커다란 ‘단절’을 보이기 때문이다. <No Direction Home>에서 작가는 기존의 사진에서와는 달리 카메라의 시선을 대상(인물) 자체에 훨씬 더 집중한다. 과거에는 인물과 공간을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다뤘다면 <No Direction Home>에서는 인물이 처한 공간 배경을 주변으로 몰아넣고 인물 자체에 집중했다. 작가는 집중된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그것은 기존 사진에서 주된 관심이었던, 인물을 둘러싼 ‘내러티브’(독립된 여성, 국제결혼의 차이, 이방인의 꿈과 자유 등)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인물 자체의 ‘대상성(objectness)’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작가는 <함일의 배>에서 관객이 인물에 대한 내러티브를 유추할 수 있도록 사진 제목에 인물의 이름과 직업을 명시했지만 <No Direction Home> 사진집에서는 아예 사진 제목을 제거하고 인물의 이름만 맨 뒤에 배치했다. 인물에 대한 어떤 텍스트 정보를 얻지 못하는 관객은 카메라 혹은 관객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인물, 그 인물 그 자체를 대면해야 한다. 작가는 왜 <No Direction Home>에서 대상을 둘러싼 ‘이야기’보다는 대상 그 자체에 더욱 주목했을까? 그것은 작가가 이 당시 자신이 평생 다뤄왔던 사진 매체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과거에 작가는 “사진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작가는 소위 도구에 불과한 사진보다는 사진이 기록하는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작가는 한 장의 사진에 대상(인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 심지어 대상에 대한 전후 맥락까지를 담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관객은 이를 추측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점차 사진이 과연 한 장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사진이 단지 실재의 ‘표면’을 2차원으로 기록하는 매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2차원의 매체이다. 사진 너머에 어떤 것이 있다는 상상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화지 표면에 맺히는 것, 그 표면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진, 그것이 가능할지.”따라서 작가는 점차 사진의 내러티브 보다는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사진 매체’ 자체를 작품의 계기로 삼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작업을 한 것이 <No Direction Home>이고 이 사진은 김옥선의 20여 년의 사진 경력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계기가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진 스토리를 벗어나 사진 자체 혹은 사진 표면으로의 이동이다. “사진이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전설에서 벗어나 사진 표면 그 자체로 가능한 인물사진 작업을 해보고 싶다.” 결국 <No Direction Home>을 통해 작가의 사진은 커다란 단절을 겪는다. 그것은 깊이의 미학에서 표면의 미학으로, 내러티브의 미학에서 사물성의 미학으로, 결국에는 문학적인 것에서 사진적인 것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No Direction Home>에서 이 같은 사물성, 표면의 미학은 아직까지 미완성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이 사진에는 여전히 문학적인 내러티브(자신, 남편, 이방인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후 작업인 <빛나는 것들>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빛나는 것들>에서도 여전히 스토리가 남아 있다. 이 사진의 소재인 제주도에 서식하는 외래종 나무는 작가 자신, 남편,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나무들을 통해 혼성, 이방인에 관한 얘기를 간접적으로 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 사진에는 이전의 어떤 사진보다도 훨씬 더 사물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그것은 작가가 피사체를 인물에서 식물, 즉 사물에 가까운 생명체로 과감하게 바꿨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관객이 사진에 투사할 수 있는 감정이입과 내러티브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사람에 비해 나무는 작가 자신이나 관객이 소통하거나 감정이입을 하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인물은 소통이 되는데 나무는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도 내가 그것을 정확하게 못 알아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저에겐 나무가 조금 더 집중을 요구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이 식물 사진에서도 여전히 사물 대신에 인간이, 대상성 대신에 내러티브가, 테크놀로지 대신에 휴머니티가 여전히 잔존한다. 작가는 과연 2011년부터 시작한 사진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 ‘사진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진 존재론적인 질문 그리고 현대사진의 화두 중의 하나인 ‘표면의 미학’을 더욱 더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작가의 향후 사진 작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박상우(중부대학교 교수, 사진이론) BACK TO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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