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의 커플 사진
박찬경
국내결혼이나 국제가족이라는 말을 우리가 쓰지 않는 것처럼, 국제결혼이라는 말은 잘 들어보면 조금 이상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국가끼리 결혼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이상할 것도 없으나 사회적 관습과 편견에 의해 특별해지는 이러한 결혼과 마찬가지로, 김옥선의 커플 사진들도 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특별해진다. 여기서 시선이란 물론, 유명한 국수주의자들인 한국인(남성)의 편견에 의해 걸러진 시선, 또는 그러한 시선을 의식하는 시선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서양 사람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을 덮어놓고 ‘양공주’로 몰아세우고 싶은 남성들, 또는 이를 내면화한 여성들은 구체제의 수호자들처럼 여전히 암약하고 있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관대한 사람조차도 제자식의 국제결혼을 선선히 승낙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러한 편견에 얽매여 있지 않은 관객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서 이 사진을 대하기는 어렵다.

김옥선이 ‘Happy Together'라는 제목의 전시(대안공간 풀, 2002)에서 보여주었던 사진 시리즈와 이후 뉴욕에서 연장한 커플 사진은, 우선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시선, 사회-문화적 편견에 대한 담담한 ‘객관주의적’ 비평이다. 이 사진들이 객관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표현의 과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에서 말이다. 장소나 포즈도 그렇고, 조명이나 렌즈의 선택과 같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유별난 시각적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보다, 두 사람(또는 아이까지 셋이나 넷)으로 프레임 안에 제한된 인물 사이의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거리나, 실내 공간에 떠도는 일상적인 침묵과 마주친다. 따라서 김옥선의 객관주의는 편견과 같은 과도한 가치평가 대신에 그러한 가치평가가 작동하지 않는 중간지대나 회색의 공간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진에서는 오히려 친밀성이라고는 없는 냉랭한 현대연극처럼 다소간 스타일라이즈stylize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진은, 부부나 동거인 사이의 애틋한 사랑도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심드렁해진 남녀 그리고 동성애 커플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김옥선의 비 감정적인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이와는 달리 하나의 특수한 제도로서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결혼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특수한 일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제결혼은 제도로서의 가족의 일반문제를 비유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일반 가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김옥선의 커플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러므로 두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국제결혼이라는 특수한 차원의 문제와, 가족 일반의 문제이다. 우리의 일반 가족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를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옥선의 질문 - “국제결혼이 안고 있는 차이들은 소위 말하는 문화적인 것Cultural Gap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것Personal Gap인가?” -은, 국제결혼만이 아니라 일반 가족이나 커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어디까지가 문화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인지, 또 문화적인 것 중에서도 어디까지가 서구적이고 동양적인 것인지, 미국적이고 독일적인 것인지, 경상도적인 것이거나 전라도적인 것인지, 어디까지가 귀족적이고 어디까지가 천민적인 것인지, 남성적인 것이고 여성적인 것인지, 또 이 모든 차이들의 개인적 접합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김옥선의 사진이 이에 대해 어떤 명확한 답을 줄 수도 없고 또 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진에서 보이는 인물은 일단 ‘구제할 수 없이 개인인 개인’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현대사회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는 수다 상품들 속에 살고 있지만, 사랑이나 결혼이 반드시 이 커플들에게 일어나야했다는 필연성을 믿기 어렵다. 그 보다는, 우리는 이 사진에서 결혼이나 동거의 결정이 이 커플들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확인한다. 우리는 심지어, 그들의 이러한 ‘국제결혼’이 어렵게 성사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으며, 인종적 성적 계급적 차이들을 넘어 개인의 위대한 결합이 성사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사회적 편견을 참고 견디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의 어떤 통념이나 특수관 관점, 또는 국제결혼 법과 제도의 문제 등에서 벗어나, 개인 사이의 관계문제로 접어들면, 그것이 일반 부부나, 동거인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비해 특별히 복잡하거나 또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김옥선이 이 사진들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 이렇게 들린다. - ‘개인이 하나의 집단적 문화인 결혼제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났다’이다.’ 그것은 호와 불호, 행복과 불행과 같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다소간 실존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커플들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제공이나 코드 해석, 또는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추측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대한 대면이다.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결혼, 동거’라는 제도가 ‘하여간’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바로 이렇게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상황과의 대면이다. 이러한 ‘대면’의 기능은, 남이 본 것을 나중에 우리가 본다는 사진의 특징 때문에, 사진에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옥선의 사진에는, 사진에 주어진 대면보다는 더 전략적인 대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국제결혼을 했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치유하기 위해 찍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사진 중에 나오는 여성이나, 동성일 경우 한 인물은 언제나 사진가를 바라보도록 했다. 여기서 1차적인 대면은 사진가와 찍힌 여성, 인물과의 대면이다. 즉 사진가만 상황을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의 여성 또한 사진가와 대면한다. 관객은 자동적으로 사진가의 시선으로 대상과 마주친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무대위의 상황이 제3의 인물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의해 중단되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여기서는 그러한 중단이, 모든 인물이 아니라 한 인물, 즉 작가가 선택한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연극의 방백(傍白)처럼, 극중 인물이 다른 극중 인물 모르게 관객을 향하여 말하는, 관객참여를 위한 또 다른 기술에 더 가깝다.

문제는 이 방백의 내용이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사진은 연극이 아니므로 언어로 무엇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에 그들은 무언가를 보고 있다. 이들은 이들이 속해있는 대체로 비좁은 동거 공간 바깥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렌즈와 필름이라는 상상적인 거울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비유, 은유적 확장으로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바깥의 공간은 이러한 결혼이나 동거가 반드시 이렇게 되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 결혼이 하나의 제도로서 나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 또는 ‘나’(사진을 보는 인물)는 이 공간(실제공간, 제도공간 등의)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등을 지시한다. 쉽게 말해서 인물과 대면하는 관객으로서의 내가, 인물이 속한 공간과 분리된 상태로 그 인물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이 속한 공간이란, ‘국제결혼’의 공간, 그냥 ‘결혼’의 공간, 아내와 엄마의 공간, 부엌, 침실, 거실이다. 그로부터 분리된 인물은 당연히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상승하며, 우리는 그/그녀에게 국제결혼이라는 미안한 이름을 전처럼 편리하게 써먹을 수 없다.

박찬경 (작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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